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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Oct 13. 2021

마침내 오로라가 떴다, 영영 잊지 못할 초록빛 마법

감격의 눈물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혼행을 좋아한다. 아내가 함께하는 여행이 아닌 이상(누구 보라고 쓴 건 아님). 마음이 안 맞는 사람이랑 몇 날 며칠을 지내느니 질겅질겅 고독을 씹는 편이 좋다. 성격이 예민한데다 다른 사람 비위 맞추는 걸 체질적으로 못한다. 패키지여행도 웬만하면 피하는데 단체여행의 인솔자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됐으니 순간순간이 고역이었다. 게다가 이역만리 캐나다 오지로 ‘오로라 테마여행’씩이나 와서 사흘 연속으로 오로라를 못 봤으니 숯검댕이가 된 나의 속은 누가 알아줄까.

오로라 관측 실패기는 아래 글 참조▼


이제 딱 하룻밤 남았다. 손님 17명 중 오로라 못 봤다고 여행비를 돌려달라거나 왜 설명회 때 말한 관측률이 안 맞냐고 멱살을 잡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 점잖은 어른이어서 실망감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이분들이 오로라 여신을 못 보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꽤 오랫동안 나도 아쉬울 것 같았다. 손님 중에는 대기업 임원 출신 70대 어르신도 있었고 창창한 20대 대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남녀노소, 지위고하, MBTI, 사상체질을 떠나 그 누구든 실패한 오로라 여행을 다시 감행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테다.

마지막날 낮에는 개썰매투어를 했다. 대낮에도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였던 터라 희망자만 참여했다. 2인 1조로 6마리 알래스칸 허스키가 끄는 썰매를 타는 프로그램이었다. 얌전하던  댕댕이들이 출발 기미가 보이자 산이 떠나도록 짖기 시작했다. 썰매 끌기 싫다고 시위를 벌이는 건 아니다. 허스키는 체질적으로 달리기를 좋아하고 수천년 동안 북극권 추위에 적응하며 살았기에 이런 추위쯤에 끄떡하지 않는다.

“끼약, 어떡해!!”

모두 썰매가 출발하길 기다리는데 한 손님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사고라도 난 걸까. 혹시 개가 물었나? 가이드와 함께 황급히 손님에게 달려갔다. “개들이 너무 침을 질질 흘리고 짖어서 무섭잖아요.” 다행히 사고는 아니었다. 썰매투어 업체 직원이 설명했다. “겁먹을 필요 없어요. 개들은 지금 기분이 좋고 달리고 싶어서 저러는 거예요.” 손님을 안심시키고 돌아서려는데 그 손님이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개 좀 바꿔주면 안돼요? 좀 예쁜 아이로.” 할 말이 없었다. 이 와중에 귀여운 개랑 인증샷을 생각하다니. 저기, 어르신. 인스타 하세요? 어쨌거나 북극권 원주민이 된 것처럼 꽁꽁 언 호수와 가문비나무 숲을 질주하는 썰매 체험을 잘 마쳤다. 진짜 겨울왕국에 온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썰매놀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늑한 분위기의 통나무집에서 각자만의 휴식시간을 누리며 밤이 오길 기다렸다. 나도 모처럼 무념무상의 시간을 가졌다. 테라스 문을 여니 얼어붙은 호수에서 눈싸움을 즐기고, 설피(스노슈즈)를 신고 하이킹을 즐기는 손님들이 보였다. 깔깔거리며 영화 ‘러브레터’를 재연하는 중년 부부도 있었다. 눈의 힘을 느꼈다. 사람을 천진한 동심의 세계로 이끄는 힘 말이다.

낮에는 제법 굵은 눈발이 날렸다. 절망스러웠지만 날씨 앱을 보니 밤에는 그치는 걸로 나왔다. 그냥 눈이 안 오는 정도가 아니라 Clear, 그러니까 이번 일정 중 처음으로 ‘맑음’이 예보됐다. 오로라 예보 사이트를 보니 KP3 정도로 제법 센 오로라가 예보돼 있었다. 저녁을 다 먹고 창밖을 봤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맑았고 총총 박힌 별들도 잘 보였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늘 밤은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모든 조건이 아주 좋습니다.”

맛난 저녁에 와인을 한두 잔 걸친 손님들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객실에서 뛰쳐나갈 채비를 하고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오로라 여신이  나타날  같았다. 오후 11 숙소 문을 열었다. 북동쪽 하늘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지랑이 피는 것처럼 하늘이 일렁였다.  일렁임이 회색, 옅은 연두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진한 초록색 띠가 나타났다. 소리쳤다. “모두 나오세요. 드디어 왔습니다. 오로라가 왔다고요!”  모두가 월드컵 4 진출 때처럼 소리치며 뛰쳐나왔다. 함께 시야가  트인 호수로 내려갔다.

초록색 띠가 하늘을 동서로 가르더니 계속 꿈틀대며 넓어졌다. 그러더니 예술의전당 음악분수처럼 그 띠가 춤을 추면서 현란한 빛의 향연을 펼쳐보였다. 초록색 띠 가장자리는 자줏빛, 보랏빛으로 물들며 더 황홀한 모습을 보였다. 눈물이 찔끔 흐르진 않았다. 감격의 눈물보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여행사 인솔자와 '다 됐다. 이제 끝났다'며 포옹했고, 기뻐서 소리치는 손님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오로라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드리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영하 20도, 체감 기온 영하 30도라는 사실도 못 느꼈다.


이날 오로라는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간 맘 졸인 걸 알아주기라도 하듯 밤새도록 초록빛 춤사위를 보여줬다. 호수 한쪽에서 말없이 오로라를 카메라에 담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70대 후반 최연장자 손님은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사진 따위 귀찮다는 듯 숙소 테라스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오로라를 보는 쿨한 손님도 있었다. 그 맛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이날은 오전 6시 밴쿠버행 비행기가 예약돼 있었다. 그러니까 숙소에서 4시 반에는 출발해야 했다. 손님 대부분이 그 시간까지 밤새 오로라를 감상했다. 공항 가는 버스 차창으로도 오로라가 어른거렸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오로라의 등장으로 캐나다 유콘 여행은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징글징글한 전염병이 전 세계를 집어삼키리라고는 아무도 모른 채 영영 지워지지 않을 진한 초록빛 추억을 안고 돌아왔다. 한국행 비행기에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오로라를 본 사람들은 평생소원 하나를 이뤘다. 그런데 소원을 이룬 뒤 뭐가 달라졌을까? 사람들이 좋은 걸 보면 흔히 ‘힐링됐다’고 하는데 오로라에서 어떤 치유의 광선이라도 나와서 아픈 곳을 치유해줬을까? 오로라를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뒤 개과천선해서 착한 사람이 됐을까? 아니면 그냥 남들 부러워하는  자랑거리 하나를 쌓은 것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여행을 떠날 때 뭔가 달라지길 꿈꾼다. 여행을 마치고 나면 더 나은 내가 돼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여행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말들이 불편한 이유다. 2년 연속으로 오로라를 봤지만 여전히 나는 같은 사람이다. 지하철에서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면 꿀밤을 때려주고 싶고, 아내의 카톡 메시지를 보고 맞춤법 트집 잡는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 뭘 바꾼다는 말보다는 그냥 ‘순간’을 믿으련다. 오로라를 만난 순간 분명 나는 환청을 들은 것 같은 경험을 했고, 이 위대한 우주와 자연 앞에서 나는 한 점 먼지에 불과하고 내가 앓는 사소한 문제들은 먼지 속 원소 밖에 안 된다는 걸 섬광처럼 깨달았다. 그래서 사는 게 팍팍할 때 마음속에 그 순간의 기억을 끄집어내 붙들고 잠시라도 환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이역만리 극지까지 가서 얻은 깨우침이 있다면 이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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