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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Feb 25. 2021

풀빌라, 다신 안 가기로 했다

발리의 추억 서린 숙소 두 곳

숙소에 진심인 편이다. 값비싼 호텔을 놀러 다니는  취미는 아니다. 오랫동안 국내외 여러 도시를 출장과 휴가로 다니다 보니 나름의 취향과 관점을 갖게 됐을 따름이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추억이 서린 숙소가 두 곳 있다. 발리는 말 그대로 숙소 천국이다. 가성비 출중한 저렴이부터 세계적인 셀럽이 묵은 초호화 리조트까지 막강한 진용을 갖추고 있다. 아마도 동남아 휴양지 가운데 가장 선택 폭이 넓고, 개성 강한 숙소도 많은 곳이 발리일 것이다.

https://brunch.co.kr/@gipsyboy/10

우붓 논길을 걷다가 만난 황홀한 하늘.

먼저 2017년에 가본 ‘우붓’. 소문으로 익히 들었던 동네다. 상업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 해변 리조트 지역과 달리 분위기가 호젓한 내륙 지역이다. 남쪽 해변에서 택시를 타고 1시간 가까이 달려야 도착한다.

우붓에 기대가 더 컸던 건 당시 일주일 휴가 중 가장 비싼 풀빌라를 2박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신혼여행도 아닌데 굳이 풀빌라를 잡은 건 남들 신혼여행 때 가보는 풀빌라를 우리도 한 번은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아내의 제안에 따른 거였다. 내심 허니문 기분도 날 것 같았다.

기대했던 대로 우붓은 아늑했다. 특히 ‘계단식 논’은 보고만 있어도 평온이 느껴졌다. 발리의 짙푸른 바다와 백사장도 좋았지만 열대식물 우거진 숲이나 너른 들판을 볼 때처럼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초록 들판을 보며 평온을 느끼는 건 유년의 기억 때문일 테다. 어릴 적, 방학 때마다 할머니가 사시는 전남 영암 시골집에 내려갔다. 여름방학 때는 어김없이 한 달씩 지냈다(한달살이 원조가 나였구먼).

청청한 평야와 개구리, 풀벌레 소리, 축축한 숲 냄새까지 자연 그 자체가 좋았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고졸한 시골 음식과 무릎베개를 밴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 손길까지, 내 생애 공감각적으로 가장 충만한 행복을 누렸던 시기일 것이다.

우붓 정글피쉬 풀 바. 저기서 수영을 하면 정글 속을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든다.

우붓에서는 ‘차풍 세발리’라는 숙소를 예약했다. 숙소도 숙소지만 ‘정글 피시’라는 풀장이 더 유명한 곳이다. 체크인을 마치고 독채형 풀빌라를 배정받았다. 수영장과 정원, 둘이서 뛰어도 될 만큼 널찍한 객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이 진짜 발리로구나,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계속 '우와 우와'를 연발하며 빌라를 구경했는데 잠시 후, 어디선가 꺅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 ‘13일의 일요일’ 속 제이슨이라도 나타난 것 같은 괴성이었다. 달려가보니 욕조에 시커먼 개미 떼가 한 줄로 지나가고 있었다. 변기 위에서는 거미가 줄을 늘어뜨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자연주의를 표방한 풀빌라여서, 욕조와 변기가 야외에 있었는데 벌레를 보고 아내가 기함한 거다.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사방에서 벌레가 튀어나올 것 같아.”

“원래 풀빌라가 대체로 이래. 여기 수영장 이름도 정글이잖아. 정글.”

“이래서는 잠을 한숨도 못 잘 것 같아.”

“자기가 여기 골랐잖아. 감수해야지.”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벌레 한두마리 잡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여긴 정글이니까.

아내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여보, 정말 미안한데 우리 방 바꿔달라고 하면 안 될까? 풀빌라 아니어도 되니까 이런 개방형 독채 말고 화장실이 안에 있고 창문이 튼튼한 객실로.”

후우~ 한숨을 내쉰 뒤 프런트로 갔다. 미안하다, 짐은 안 풀었다, 더 싼 방이어도 괜찮으니 바꿔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친절한 직원이 알겠다며, 다운그레이드이긴 해도 차액은 내줄 수 없다고 했다.

새 객실은 부티크 호텔 느낌이었다. 독채 빌라는 아니어도 충분히 넓었다. 수영은 못해도 발장구 칠 수 있는 정도의 풀도 있었다. 우붓의 천연 정글이 보이는 전망도 근사했다. 다행히 벌레 떼의 습격 없이 두 밤을 아주 편하게 보냈다. 이후 우리는 풀빌라의 ㅍ 자도 꺼내지 않았다. 수영은 공용 풀장에서 원 없이 즐겼다.


다음은 사누르 지역의 타무카미(Tamukami) 호텔. 2020년 2월에 묵었던 호텔이다. 코로나 때문에 외국인 발길이 뚝 끊긴 뒤여서 발리 호텔 대부분이 텅텅 비어 있었다. 하룻밤 4만원짜리 치고는 수영장도 널찍하고 객실도 준수했다. 해변 가까이 있는데도 야자수와 열대식물이 우람하게 자라 있고 조경도 근사했다. 발리와 유럽이 만난 느낌이랄까. 가격은 훨씬 저렴한데 3년 전 우붓 정글 숙소 분위기였다(벌레는 없어야 할텐데).

발리의 여느 숙소가 그랬지만 이 호텔은 직원들이 유달리 친절했다. 모든 직원이 늘 웃는 낯이었고, 사소한 질문도 성의껏 답했다. 아침을 먹으며 한 직원에게 타무카미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우리 손님’이란 뜻이고, 정원을 손질하고 있는 벨기에인 ‘수잔’이 호텔 주인이라고 얘기해줬다.

사누르 지역의 타무카미 호텔.

엇? 저 할머니? 누가 봐도 소박한 인상의 금발 할머니 하고는 어제 수영장에서 인사를 나눴다. 나는 느긋하게 수영을 하다가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었고, 할머니는 물속에서 아쿠아로빅을 하듯이 열심히 그러나 다소 어설프게 운동을 했다.  그냥 장기휴가를 온 유러피언인 줄 알았다.

오후 느지막이 수영장에서 다시 한 번 할머니를 만났다. 역시 그는 열심히 물속에서 팔다리를 휘젓고, 앞뒤로 걸었다. 갑자기 취재 본능이 발동했다.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호텔에 대해 물었다.

 “이 호텔 직접 지으셨다면서요? 몇 년도에..”

“나인틴 나인티 나인~”

세기말, 클럽에서 DJ가 넣던 추임새 ‘1999’이 이렇게 귀엽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벨기에 사람인 자신이 발리에 와서 호텔을 하게 된 사연을 술술 이야기했다.

수잔과 남편은 아이가 없었다. 어쩌다 형편이 어려운 인도네시아 아이의 후견인이 됐다. 돈만 보내준 건 아니었다. 자주 발리를 오가며 아이를 부모처럼 보살폈다. 그리고 건축가였던 남편이 은퇴한 뒤 아예 벨기에를 떠났다. 발리에 호텔을 지어 여생을 보내고, 돌보던 아이가 일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수잔은 “처음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맺게 됐을 때는 한 명의 딸을 얻은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스무 명의 자녀(호텔 직원)와 함께 사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숙소를 떠나기 전, 수잔에게 양해를 구했다. 언젠가 여행 책을 한 권 쓸 계획(그 언젠가가 대체 언제입니까?)인데 당신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괜찮다면 사진도 넣고 싶다고 했다. 수잔은 이왕이면 남편과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호텔 한편, 의자에 앉아 있던 남편을 찾아갔다. 그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거동이 불편했다. 얼굴 근육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힘써 웃는 표정에서 행복이 읽혔다.

1년이 흐른 지금, 수잔 부부와 호텔의 안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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