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보다 피말리는 오로라 확률 게임
“기 많이 받고 와라. 오로라 보면 아들 낳는단다.”
출장 떠나기 전 팀장이 툭 던진 말이다. 캐나다 가서 오로라를 원없이 봤다. 기가 약했던 걸까? 나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딸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오로라를 본 건 좋은 경험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또 오로라 여행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남들이 버킷리스트로 꼽는 걸 두 번씩이나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1년여 만에 다시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심지어 어르신 17명을 모시고.
코로나 사태 전, 회사는 여행사와 공동사업을 벌였다. 독자를 대상으로 고급 테마여행, 이른바 SIT(Special Interest tour) 상품을 기획해 판매한 거였다. 아프리카, 쿠바, 스페인 산티아고 같은 곳을 다녀왔고 다음 테마가 캐나다 오로라 여행이었다. 한차례 경험이 있는 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인솔자와 가이드는 따로 있고, 일종의 도슨트 같은 역할을 맡는 거였다. 광고에 여행전문기자가 함께 간다는 내용도 실렸고, 여행 설명회도 했다. 민망했다. 오로라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줄 전문가도 아니고, 유홍준 교수 정도는 돼야 ‘OO와 함께 가는 여행’이 어울릴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내 얼굴이 작게 들어간 신문 광고가 나간 뒤 금세 정원 17명이 마감됐다. 500만원이 넘는 제법 비싼 여행상품이었는데도 말이다.
여행 출발일이 다가왔다. 한데 불길한 기운이 이웃나라로부터 덮쳐왔다. 우한 폐렴이라 불리는 질병이 세계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국내 확진자도 나왔다. 일본 앞바다에선 대형 크루즈선에서 집단 감염자가 속출했다. 동양인 혐오 범죄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해외여행을 취소하는 분위기가 번졌다. 우린 무사히 출발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당시 캐나다는 코로나 안전지대였다. 넓은 땅덩어리에 비해 감염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펜데믹 선언을 하기도 전이었고 우리 정부도 입출국에 제약을 두지 않아서 여행을 강행했다. 예약자 17명 모두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로라 여행이 평생소원이어서 그랬는지, 취소 위약금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2020년 2월 말, 에어캐나다 비행기를 타고 밴쿠버를 경유해 화이트호스에 도착했다. 1년 3개월 만에 만난 화이트호스는 여전했다. 온 세상이 하얬고 찬바람이 생생 불었다. 어디 가나 한산했다. 그리고 아무도 마스크를 안 쓰고 있었다. 첫날밤부터 오로라 투어에 나섰다. 일기예보처럼 오로라 예보도 있다. 태양풍과 지구 자기장의 작용으로 오로라가 발생하는데 그 만남이 얼마나 격렬한가에 따라 세기가 결정된다. 세기를 KP 1~10으로 분류한다. 4박 일정 중 첫째 날이 가장 강한 걸로 예보됐다. 그러나 오로라는 세기만 강하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늘이 맑아야 한다. 먹구름이 끼면 말짱 도루묵이다. 바로 첫째날이 그랬다. 손님들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사흘 밤 도전하면 오로라 볼 확률이 90%가 넘는다니 남은 날을 기약해 보시죠.” 다행히 장거리 비행을 한 첫째날이어서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튿날 늦잠을 잔 뒤 일정을 시작했다. 야생동물 보호소에서 북극여우·순록 같은 북극권 동물을 구경하고, 노천온천에서 언 몸을 눅이며 피로를 풀었다. 결전의 밤이 다가왔다. 두번째 오로라 사냥에 나섰다. 사실 이날은 일찌감치 내가 기대를 낮추는데 진력했다. 종일 하늘이 흐렸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오로라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라 관측소에서 장작불을 쬐고, 인디언 텐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때웠다. 오후 10시부터 시작해 새벽 2시까지, 시간이 참 더디게 흘렀다. 속이 타들어갔다. “아직 이틀밤이 남았습니다. 100%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하루는 볼 수 있을 겁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기가 파는 물건에 확신이 없는 약장수가 된 기분이었다.
셋째날 주간 일정은 조금 우려스러웠다. 박물관 구경, 양조장 견학. ‘센 한방’이 없는 소소한 스케줄이었다. 오로라 없는 화이트호스가 이렇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도시의 '귀여운 면모'도 좋아하지만 손님 입장에서는 소소한 재미나 느끼려고 비싼 경비를 치른 건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별 탈 없이 지내던 손님들의 표정이 조금씩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샌드위치를 먹다가 입천장 까졌다고 컴플레인하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몸살이 나 일행 전체를 걱정시킨 손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 감염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손님은 금방 회복했다.
두 밤을 화이트호스 시내 호텔에서 지낸 뒤 나머지 두 밤을 위해 호숫가 산장으로 이동했다. 이름은 인 온 더 레이크(In on the lake). 캐나다에서도 수많은 셀럽이 이용한 명성 자자한 숙소다. 최소 2박 이상을 머물러야 하는데 겨울에는 방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숙소 자체도 좋을뿐더러 제공되는 음식과 서비스가 정평이 나 있다. 산속 호수에 틀어박혀 있어서 오로라가 잘 보인다는 것도 이 숙소의 자랑거리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강조했다. “오로라도 중요하지만 이 숙소야말로 ‘윈터 원더랜드’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캐나다인도 버킷리스트로 꼽는 곳이니 최대한 숙소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다시 밤이 왔다. 이제 속이 타들어가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날도 종일 흐렸다. 그리고 구름은 밤늦도록 걷히지 않았다. “기자님이 오로라 90% 보장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손님 중 한 명이 쏘듯이 얘기했다. 샌드위치가 딱딱하다고 불평한 그 손님이었다. 심리적 멱살을 잡히고 정신적 따귀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3일 동안 오로라가 아예 안보였으니 우리 일행의 오로라 관측 확률은 0%였다. 확률 게임이란 게 이렇다. 성공하면 100이고, 실패하면 0이다. 중간은 없다. 나는 사기꾼이었다. 그래도 다른 손님 한 분의 말씀이 위로가 됐다. “오로라 못 봐도 괜찮아요. 지금까지 보낸 시간만으로 충분히 만족해요. 저런 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이런 쿨한 어른이라니.
손님 대부분이 오로라 관측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딱 두 분, 경상도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하는 환갑 즈음의 부부만이 눈 덮인 호수 위에 서 있었다. 일정 내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얌전했던 분들인데 20대 커플처럼 속닥속닥 다정해 보였다. 나도 할 일이 없었던 터라 그들 곁으로 다가가 3m쯤 거리를 두고 함께 하늘을 바라봤다. “이러다 갑자기 구름이 확 걷혀서 오로라가 짠 하고 나타날 수도 있잖아예.” 부부의 천진하고 밝은 기운이 내게도 전해졌다. 괜히 감사하고 미안했다.
끝내 맑은 하늘은 나타나지 않았다. 육안으로 보이진 않았어도 카메라에 어슴푸레한 초록빛이 담겼다. 두 분은 자랑하듯 내게 사진을 보여줬다. 그 사진을 보니 절로 기도가 나왔다. 내일, 마지막 밤에는 이 카메라에 진한 초록빛 오로라가 담기게 해 달라고. 두 분을 생각해서 잠시라도 초록빛 커튼을 비춰달라고.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체면치레를 하고 싶어 한 기도였다. 사기꾼으로 남기 싫어서 한 기도이기도 했다. 사람 피 말리는 오로라 여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