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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Feb 21. 2021

신물난 발리를 다시 찾은 사연

마지막 해외여행의 기억

2020년 2월, 발리로 휴가를 다녀왔다. 물론 이 여행은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었다. 다행히 무척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지난 1년여간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원래는 방콕을 가려고 했다. 해마다 1~2월이면 작년치 남은 연차휴가를 소진해야 해서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고 따뜻한 동남아를 다녀오곤 했다. 아내가 방콕을 못 가본 탓에 일찌감치, 그러니까 2019년 하반기 항공사 프로모션을 노려 저렴한 티켓을 구해 놓았다. 타이에어아시아 인천~방콕 왕복 항공권과 방콕 도심 호텔, 파타야 인근 코사멧이란 섬에 저렴한 리조트를 예약해두었다. 한데 코로나 확산 초기, 태국이 심상치 않았다. 중국과 국경을 맞댄 탓에 확진자가 수천명씩 쏟아졌다. 당시만 해도 이 병을 우한 폐렴으로 부르는 이가 많았다.


눈물을 머금고 방콕 여행을 취소했다. 항공권은 취소 수수료를 조금 떼였고 숙소는 아고다 해외 콜센터, 다시 숙소 직원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전액 환불을 받아냈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행운이었다. 코로나 확산 이후 예약금을 돌려받지 못해 피눈물 흘린  여행객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해 질 무렵, 사누르의 보랏빛 바다.

여행을 포기했으니 집에서 푹 쉴 작정이었다. 그런데 ‘검색의 신’ 아내가 조심스레 제안을 해왔다. 휴가 예정일 이틀을 앞두고 엄청 싼 항공권을 찾아냈다고, 목적지는 발리라고 발했다. 하필 발리?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중국발 비행편을 일찌감치 차단해 다른 동남아 국가보다 코로나 확진자가 극히 적대"라고 말했다. 팩트로 압박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항공권이 비싸기로 소문난 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의 발리 직항편이 저비용항공사 수준으로 저렴했다. 검색의 신에게 완벽히 설득당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면 당분간 외국에 가긴 어렵겠다 싶었다. 호텔 2박만 급하게 예약하고 이틀 뒤 발리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발리는 두번째였다. 2017년 첫 발리 여행 때는 스미냑, 쿠타, 우붓 등 여러 곳에 숙소를 잡아두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일정은 대체로 아내가 짰는데 나도 발리가 처음인지라 이곳저곳 가보고 싶었다. 발리가 제주도의 세 배에 달하는 큰 섬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가보니 정말 컸다. 그 큰 섬에는 가는 곳마다 세계 각지서 온 여행자들로 북적거렸다. 스케줄이 빡빡하니 아내와 자주 다퉜다.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거였다. “거기 꼭 가야 해?” “여기 완전 한국이네? 네이버 블로그에서 찾은 집이야?” 여행 중 여러 차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키보드로 다시 써보니 참 밥맛이 떨어지는 말들이구나. 못난 남자.


첫번째 발리 여행 때 아내가 말했다. "10년 뒤쯤 발리를 다시 간다면 한 동네에만 머물자"라고. 그리고 ‘사누르’라는 곳을 언급했다. 발리에서도 비교적 한적하고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고, 주로 유럽의 노인들이 찾는 한물간 휴양지 분위기라고.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가볼 곳이 세고 셌는데, 다시 발리라니. 백발이 돼서라면 모를까.'

사누르는 유럽 할배, 할매들이 좋아하는 한갓진 동네다.

10년이 아니라 3년만에 발리를 다시 찾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우리의 목적지가 사누르인 건 당연했다.  6일간 오로지 사누르에만 머물렀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중국발 비행기를 차단해서였는지, 전 세계 관광객이 여행을 멈추기 시작해서였는지 발리는 한산했다. 몇 안 되는 여행객은 대부분 백발 노인들이었다. 세계적으로 명성 자자한 여행지가 이렇게 썰렁할 수 있다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3년 전만 해도 쿠타 해변은 중국인이 점령했고, 택시와 오토바이 경적소리가 밤새 멈추지 않았다. 식당과 펍에서 거나하게 취한 호주 아재(발음으로 추정컨데)들이 거만하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영 거슬렸다.


반면 2020년 2월, 사누르는 평화로웠다. 느긋했고 조용했다. 우리는 이 도시에 걸맞게 여행했다. 되도록 걸어다녔고, 해변과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한껏 게으름을 부렸다. 먹는 것에도 목숨 걸지 않았다. 발길 닿는 곳에서 대체로 저렴한 음식을 사 먹었다. 인도네시아식 백반인 '나시 짬뿌르'를 제일 많이 사 먹었다. 섬 한 군데 빼고는 관광명소로 알려진 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하다 하다 심심해서 요가 프로그램에 참여해본 정도였다. 발리의 눈부신 하늘과 바다, 짙은 녹음을 만끽하는 순간만으로 충일한 기분이었다.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찾아간 요가원.

“이렇게 아무 계획이 없으니 다투지도 않고, 우리 참 평화롭게 잘 지내네.” 여행 마지막 날 아내가 한 말이었다. 일정이 느슨했던 덕도 있었겠지만 나는 사누르가 우리의 코드에 잘 맞는 여행지라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바이러스 확산으로 예기치 않게 세계적인 여행지가 텅 비어버린 상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여행 글을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발리 여행을 통해 배운 게 있었다. 가끔은 아무 계획 없이 떠나거나 힘 빼고 저질렀을 때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 할배가 되어서나 가리라 생각했던 발리를 다시 찾을 줄, 다른 어느 곳보다 발리와 사누르의 공기를 뼈저리게 그리워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이어서 발리의 숙소 이야기 ▼

https://brunch.co.kr/@gipsyboy/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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