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드림 카, 이런 건 없지만
“선배는 드림 카가 뭐예요?”
작년 여름 즈음이었나. 내 차를 타고 함께 문상을 가던 회사 후배가 물었다.
“야, 난 그런 거 딱히 없어. 아니다. 있다, 있다. 지금 네가 탄 차.”
그렇다. 나는 드림 카를 가진 자다. 자가용이란 게 대출 신청을 할 때 중요 자산으로 따지는 항목이라는 점에서 '내 차는 이거요' 하고 말하는 건 집 평수를 까발리는 것만큼 남세스러운 일이다. 이왕 차 얘기를 꺼냈으니 빙빙 돌리지 않고 차종을 공개한다. 폭스바겐 골프 6세대(2011년식) TSI 모델. 배기량은 1400cc. 9살, 8만3000km 달린 녀석을 지난해에 입양했다.
중고차 구매는 충동적이었다. 신혼 때 산 포르테가 멀쩡히 잘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만천하의 동네북인 코로나19를 지목해야겠다. 바이러스 확산으로 해외 출장을 다닐 일이 없어졌다. 대신 국내 출장이 크게 늘었다. 국내 출장은 대부분 자가용으로 다니는데 좀 더 잘 달리는 녀석이 있었으면 했다. 나는 속도광이 아니다. 전기차나 자율주행차를 욕심내는 얼리어댑터도 아니다(이런 류의 새 차를 살 자본도 없다). 그냥 예전부터 몰아보고 싶었던 차를 상황과 여건이 허락해서 지른 거였다. 엄밀히 말하면 엄청 좋은 차로 바꾼 것도 아니다. 가격은 조금 더 나가지만 실내는 골프가 포르테보다 좁고 배기량도 200cc나 적다. 그러니까 '옆그레이드', '다운그레이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골프를 처음 본 건 운전병 복무를 마치고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에서 발레파킹(명품 백화점인지라 대리주차라는 말을 절대 안 쓴다.) 알바를 할 때였다. 이때 온갖 수입차를 다 타봤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차가 골프였다. 비록 몇십, 몇백 미터 거리만 그것도 아주 천천히 몰아봤지만 골프는 단단하고 당당했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대형 세단에도 꿀리지 않는 다부진 기품이 느껴졌다. 있을 것만 딱 있는 인테리어도 매력적이었다. 영화감독 김지운씨가 백화점 단골이었는데, 그의 쑥색 4세대 골프가 유난히 멋져 보였다. 기자가 된 뒤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에 출장을 가서도 골프를 몇 번 타봤다. 역시 골프는 한국의 백화점 주차장보다 유럽의 찻길이 어울리는 차였다.
유럽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머리는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하고 어깨는 시트 양 옆으로 흘러넘치는 큰 체구의 유럽인이 작은 차에 몸을 구겨 넣는 모습이었다. 인구 밀도, 도로 혼잡도가 유럽을 뛰어넘는 한국에서는 왜 작고 실용적인 해치백 차는 인기가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 큰 차를 선호하는 한국의 자동차 문화에는 어깨뽕 같은 허세가 끼어 있다고 봤다. 나아가 '한국도 덴마크처럼 비싼 차에는 막대한 부유세를 더해야 한다'에서 시작해 '북유럽식 사민주의야말로 한국의 미래다'로 생각이 번지기까지 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자료를 보니, 덴마크에서는 세금을 더한 아우디 A6 가격이 한국보다 무려 3000만원 비쌌다. 그래서인지 코펜하겐 시민들은 집이 번드르르해도 대체로 골프나 그보다 저렴한 푸조, 시트로엥, 현대의 소형 해치백을 몬다. 차 없이 뚜벅이로 사는 시민도 허다하다. 이렇게 쓰긴 했지만, 한국인이 큰 차가 조금 더 비싸진다 해서 갑자기 작은 차를 선호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결혼한 뒤 골프와 비슷한 느낌의 국산 차를 찾았다. 골프를 새 차로 사기엔 돈이 부족했고, 중고차로 사기엔 용기가 모자랐다. 괜히 차를 잘못 골랐다가 사고라도 나면? 현대 i30는 예상보다 비싸서 포기, 단종을 앞두고 할인 폭이 컸던 기아 포르테 해치백을 선택했다. 8년 동안 포르테를 몰며 ‘이건 한국판 골프야’라고 셀프 세뇌를 했다. 캠핑을 다니거나 이케아에서 큼직한 가구를 사서 차에 실을 때면 ‘역시 해치백이 실용성 갑이군! 아반떼는 이 맛을 몰라!’ 하며 만족했다. 그러면서도 해치백의 원형(Archtype)인 골프에 대한 동경은 마음 깊은 곳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 5월, 아내가 나의 충동적인 제안을 순순히 받아줬다. 포르테를 팔고, 중고 골프를 사고. 계산기를 두들겨보니 손에 쥔 500만원으로 딱 맞아떨어졌다. 엔카에서 봐 둔 차를 수원 중고차 매매단지에 가서 덥석 계약했다. 나름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 유튜브에서 ‘중고차 사는 법’을 많이 봤고, 비슷한 연식의 골프 중고차도 숱하게 검색했다.
차 상태는 인터넷에서 본 대로 양호했다. 중고차 딜러가 드라마 ‘비밀의 숲 2’의 우태하 검사를 꼭 닮았었는데, 세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수줍은 듯한 말투가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중고차 구매는 생애 처음이었지만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고, 굳이 새 차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구나 하며 안도했다.
일주일 뒤, 추가 도색 작업과 서류 등록을 마친 차를 넘겨받았다. 드디어 내가 골프 오너드라이버가 됐구나. 폭스바겐의 W자 로고가 박힌 열쇠를 쓰다듬으며 잠시 감격을 느꼈다. ‘그래, 이제 함께 전국을 누비자구나’라고 육성을 내진 않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엉덩이를 툭툭 쳐주었다.
골프를 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던 친한 형이 있다. 독일 차 예찬론자인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골프 모니까 사람이 달라 보인다, 야.”
“에이, 차 한 대 바꿨다고 뭘 그 정도까지”라고 말했지만 2.5cm쯤 솟아오르는 어깨를 억누를 순 없었다.
계속 여행 에세이 쓰다가 웬 중고차 구매 후기 냐고요? 이 친구와 함께한 본격 스릴러 여행기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