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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Sep 08. 2021

인증샷이 그렇게 중헌가요?

덕유산 야생화 짓밟히니 내 마음도 뭉개지고

나, 코로나 방역 요원이라도 된 걸까. 핸드폰에 구청 상황당직실 번호를 저장해두고 툭하면 전화를 건다. 방역 지침을 위반한 동네 업소와 이용객을 신고하기 위해서다. 집 근처 술집들이 방역지침을 어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그러니까 오후 6시가 넘어서도 세명 이상, 어떤 곳은 대여섯 명이 떼 지어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방역당국에서 상이라도 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다. 내가 감염될까봐 혹은 역병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까봐 걱정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신경 끄면 속 편할 텐데 왜 이리 피곤하게 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가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분위기에 화가 나는 것 같다.

무주 구천동 계곡.

방역 신고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코로나 상황과 관련된 고발성 기사도 열심히 썼다. 여행기자가 직업이니 여행지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게 주 업무이지만 코로나는 한가한 여행기사만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관광업계가 얼마나 어려운지, 코로나19가 우리의 여행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등등 예전에는 잘 안 쓰던 딱딱한 기사도 많이 쓰고 있다. 지난해 취재 계획이 없던 덕유산을 다녀와서도 ‘한 건’ 썼다. 역시나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고 화가 났던 것 같다.


작년 7월, 덕유산 남쪽 지역인 경남 거창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 볼일을 마치고 남는 시간에 덕유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정상 높이는 무려 1614m. 등산 채비를 해오진 않았다. 다행히 우리의 덕유산은 케이블카를 갖추고 있었다(케이블카 예찬론자는 아닙니다만).

 

케이블카는 20~30분만에 정상부에 도착했다. 공기는 청량했고 시야는 장쾌했다. 기념사진 몇 장 찍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럴 순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산행의 맛이라도 느껴야 했다. 설천봉~향적봉~중봉으로 이어지는 정상 능선부 코스는 힘들지 않다 해서 걸어보기로 했다. 처음 걸음을 내딛을 때만 해도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얼굴 붉힐 일이 생길 줄 몰랐다.

정상석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 선 사람들.

가장 먼저 마주친 황당한 장면은 정상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늘어선 긴 줄이었다. 50m는 족히 됐을 테다. ‘덕유산 1614m’라 쓰인 바위가 뭐가 대단하다고 마스크도 안 쓰고 다닥다닥 붙어서 줄을 설 일인가 싶었다. 두 다리로 힘겹게 산을 오른 성취감을 품은 채 사진을 찍는 거면 몰라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95%는 케이블카를 타고 왔을 터였다. 그래도 덕유산이 난생처음이고 다신 오기 힘든 사람들도 많을 테니 이해하기로 한다. 해발 1614m 산에 올랐다는 건 퍽 감격적인 일이니까.


향적봉에서 중봉까지 발아래로 파도치듯 깔린 구름을 보며 사뿐사뿐 걸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나무 ‘주목’도 봤고 덕유산의 대표적인 여름 야생화인 원추리가 만발한 모습도 봤다. 말그대로 천상의 화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등산객이 많이 모여들었다. 배낭에 같은 리본을 매단 산악회 사람들도 보였다. 잠시 후 당황스러운 장면이 또 펼쳐졌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울타리 너머 야생화 밭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둘 보였다. 곧 둑이 터진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등산객이 탐방로를 벗어나 꽃밭으로 들어갔다. 킹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원추리꽃이 뭉개지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으깨지는 기분이었다. 학생들에게 '깨진 유리창 이론'을 설명하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사진 한장 찍자고 울타리 너머 자연복원 지역으로 들어간 등산객.

취재하러 온 건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그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몇몇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들어가는 거 불법인 거 모르세요?” “아 네,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답하는 사람은 그나마 양반. 출입금지구역에 돗자리를 깔고 버젓이 도시락을 까먹는 사람도 보였다.


“덕유산 정상부는 한국을 대표하는 아고산(亞高山) 지대다. 연중 습하고 바람이 세서 희귀 식물이 많이 산다. 국립공원공단은 2014년부터 아고산대 식생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탐방객이 훼손한 자연을 살리기 위해서다.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가면 3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이런 내용의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원 중인 자연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하산길에 마주친 국립공원 직원에게 정상부에 단속 인원이 없다고, 지금 완전 무법천지라고 말해줬더니 곧 올라가 보겠다는 무성의한 답만 들었다.

코로나 시대, 많은 사람이 국립공원을 찾는다. 해외여행도 못 가고 사람 몰리는 관광지는 꺼려지니 산으로 몰리는 거다. 등린이, 산린이(등산 어린이)라는 말도 코로나 시대가 유행시킨 신조어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 최후의 도피처라고 할 수 있는 국립공원을 사람들은 너무 함부로 대한다. 한국의 국립공원 보호 정책이 너무 헐렁한 걸까. 국립공원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휴지 조각 하나 보기 어려운 것과 대조적이다. 야생동물 활동을 교란하면 벌금 1000만원, 역사유적지에 낙서하면 벌금 3000만원. 우리도 미국처럼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려나 모르겠다.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닌데, 나 너무 엄근진(엄숙+근엄+진지)인가?

코로나19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다 남 얘기인 줄 알았다. 나는 별 영향을 안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예민해진 내 모습을 본다. 역병의 시대, 다 같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이때 이기적인 사람들을 보면 열불이 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거리 두기 하고 마스크 쓰는 게 전부는 아닐텐데. 지금이야말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 환경을 대하는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인데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 더 실망스러운 것 같다. 


그래서 방역 신고도 열심히 하고, 불법주차 신고도 수시로 한다. 일상이 부쩍 피곤해진 것 같다. 이 모든 걸 역병 탓으로 돌려야 할까? 모르겠다. 이제 가을로 접어들었으니 잠시 정신없는 도시를 벗어나 캠핑이나 하고 싶다. 그런데 말입니다. 캠핑장 가서도 방역 수칙을 어기는 사람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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