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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Aug 17. 2021

호수 같은 득량만 바다와 계란빵의 기억

늦여름 보성 캠핑 여행

여름만큼 저물 때 아쉬운 계절도 없는 것 같다. 참 이상하다. 사계절 중에 제일 질색하는 계절이 여름이고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계절도 여름이라고 생각하는데 밤공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짙은 아쉬움이 밀려오는 건 왜일까. 올여름은 유달리 덥더니 의외로 빨리 끝이 보이고 있다. 이번 주말부터 한주 동안 여름휴가인데 바닷물에도 못 들어가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 아니나 다를까, 휴가 기간 내내 비 예보가 떴다.

여름이 빨리 저물려 해서일까. 작년 여름 일주일 남도 여행이 더 아련하게 느껴진다. 무척이나 뜨거웠던 남쪽 바다를 원 없이 만끽했는데, 핸드폰 속 사진을 보니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였다. 2020년 여름은 꽤나 길었었나 보다.


작년 여름휴가 첫 목적지는 전남 보성이었다. 큰집이 있는 전남 영암을 마음의 고향처럼 생각하고 취재 목적으로 전남의 여러 지방을 방문했었지만 보성은 처음이었다. ‘벌교 꼬막’ 외에는 아는 게 없던 보성. 아주 낯선 그 동네의 캠핑장을 2박 예약했다. 한창 캠핑을 다니다가 한 3년을 쉬었는데 경기도, 강원도 외 지역에서는 처음 해보는 캠핑이었다. 아내와 나는 앞으로는 ‘미니멀 캠핑’을 하기로 의기투합, 텐트를 비롯한 여러 캠핑 장비를 전부 소형으로 새로 장만해서 꽤나 들뜬 마음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득량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캠핑장 위치는 괜찮았다. 휴가철이 끝난데다가 코로나 상황이 심각했던 터라 캠핑장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망 좋은 자리를 배정받아 텐트를 설치했다. 금세 사위가 어둑해졌다. 한데 이상했다. 양 옆과 뒤쪽 데크에 자리 잡은 캠퍼들이 약속이나 한 듯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다. 왼쪽에서는 한물간 아이돌 댄스음악이, 오른쪽에서는 90년대 발라드가, 뒤쪽에서는 뽕짝이 울려 퍼졌다. 아는 사람이야 알겠지만 텐트는 방음 능력 제로다. 그들에겐 캠핑의 흥을 돋아주는 배경음악인지 몰라도 내게는 소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3년 새 블루투스 스피커가 텐트·침낭과 함께 캠핑 필수품이 된 걸까, 이 캠핑장이 유독 물이 안 좋은 걸까 도통 적응하기 힘들었다.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밤 10시가 됐는데도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옆집 텐트를 찾아가 잠 좀 자자고 얘기했다. 90년대 발라드를 듣던 젊은 커플은 미안하다며 바로 음악을 껐다. 아이돌 댄스음악을 듣던 이들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었다. 한 명은 야쿠자처럼 온몸에 빈틈없이 문신을 하고 있어서 움찔했다. '보성에서 함부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도 떠올랐지만 캠핑장까지 와서 소음 때문에 잠 못 자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음악을 아예 끄진 않고 볼륨을 살짝 줄였다. 오랜만에 해후한 친구 사이인지 자정 너머까지 장작을 태우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처음엔 짜증이 났다가 살벌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순수한 주제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게 웃겨서 아내와 키득거리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너, 영화 뭐 좋아해?”

“라푼젤”

“허허 라푼젤? 난 겨울왕국이 제일 좋았는디”

“이라고 불 보며 멍 때리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당께. 이거이 진짜 힐링이제, 힐링”

“그랑께 말이여. 나 지금 너무 좋아, 너무 행복해”

다음날 아침, 옆집 남정네들의 텐트를 보고    배꼽을 쥐었다. 텐트 입구를 무지개색 바람개비와 전구로 화려하게 장식을 해둔 모습이 보였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캠핑을  것도 아니고, 인스타그램에 #감성캠핑 이라고 포스팅을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라푼젤과 겨울왕국을 좋아하는 동심의 소유자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신과는 별개로 귀여운 총각들이었다.


보성에서의 둘째날. 관광지 몇 곳을 둘러봤다. '벌교꼬막'과 함께 지역을 브랜드로 내건 게 보성녹차이니 녹차밭은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가장 유명한 대한다원은 명불허전이었다. 우람한 삼나무가 줄지어 선 산책로와 초록빛으로 너울 치는 차밭은 과연 눈부셨다. 대한다원보다 더 드라마틱한 풍광은 18번 국도에서 만났다. 달력 사진을 그대로 확장해 놓은 듯 언덕 아래로 펼쳐진 차밭을 보니 마음까지 청량감이 전해졌다.

보성의 대표적인 바다인 율포해수욕장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아예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출입금지 테이프를 빙 둘러놓았다. 잠깐 발이라도 담글 요량이었는데 아쉬웠다. 차를 몰고 다른 바다를 찾아다녔다. 여의치 않았다. 율포해수욕장처럼 백사장이 넓은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율포로 돌아와 백사장 밖에서 바다를 감상했다. 아쉽긴 했지만 율포해수욕장은 그냥 바라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잔잔한 득량만 바다 너머 고흥 쪽의 얕은 산들이 초록으로 반짝였다. 알프스의 거대한 호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허기를 달랠 겸 해변 앞 트럭에서 계란빵을 사 먹었다. 세상에나, 감격스러운 맛이었다. 옥수수 알과 채 썬 당근이 들어간 계란빵은 난생처음이었다. 보성에서 제법 괜찮은 백반집도 가봤고 유명한 한옥카페도 가봤지만 가장 인상적인 맛은 1000원짜리 계란빵이었다. 율포 바다를 생각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명품 계란빵의 맛과 고소한 향도 아련히 떠오를 것 같다. 계란빵 아저씨가 차를 몰고 서울로 올라와 장사를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는 엄한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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