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오디오 기기를 들이며
카메라, 오디오, 자동차.
들어는 보셨나, 이른바 남자 3대 악취미라 불리는 위풍당당 삼 형제다. 저 취미를 가진 남자와 결혼했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사실 돈이 궁극의 문제는 아닐 테다. 악취미에 꽂힌 남자는 가정사가 뒷전으로 밀리는 수준을 넘어 밤낮 자동차와 오디오 생각만 해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느 순간 내가 저 세 가지를 모두 좋아하고 일정 수준으로 즐기는, 그러니까 상당히 위험한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다행히 가정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진 않고 있다. 아내도 몇몇 장비를 짐처럼 여기긴 하나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오디오에 대해 쓰려던 거였는데,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온 카메라, 자동차 얘기까지 해야겠다.
먼저 카메라부터. 지금 이른바 육두막이라 불리는 캐논 6D mark2라는 DSLR(렌즈 교환식) 카메라를 쓰고 있다. 대학 졸업할 무렵 다큐멘터리 사진을 배우고 여행기자 일을 하면서 여러 카메라를 썼다. 니콘과 캐논을 넘나들다가 지금 카메라에 정착했다. 나름 사진을 많이 찍을 텐데 너무 낮은 사양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저거면 충분하다. 무엇보다 DSLR치고 가벼워서 좋다. 한때는 세로그립까지 장착한 카메라에 렌즈를 4개씩 들고 다닌 적이 있는데 지금은 가벼운 바디에 렌즈 하나 아니면 두 개만 쓴다. 어깨와 허리가 결려서 더 들지도 못할뿐더러 값비싼 장비가 좋은 사진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사진가가 출연하는 다큐를 종종 본다. 그때마다 작가의 목에 걸린 라이카를 보면 뽐뿌가 오긴 한다. 다행히 뽐뿌가 아주 세진 않다. 니콘의 색감이 그립거나 소니의 휴대성이 부러울 땐 싹 팔고 넘어갈까, 하는 유혹이 온다. 그러나 지금 장비를 다 처분하고 새로 사들이는 게 보통 번거로운 게 아니어서 엄두를 못 낸다. 가장 중요한 이유, 통장 잔고가 가문 날 한라산 백록담 수위처럼 간당간당하다.
자동차에 대해서는 이미 브런치 글 3개로 충분히 썼다(위 링크 참고). 원래는 여행기를 쓰려다 다른 길로 세서 쓴 중고차 이야기가 이례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모든 글이 다음 '자동차' 카테고리의 메인을 장식한 걸 보고 이참에 자동차 블로거로 전향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거나 2011년식 골프 6세대를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몰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은 잘 탈 것 같다. 같은 폭스바겐 브랜드의 티구안이나 요즘 나온 반자율주행차를 타보고 싶긴 하지만 역시나 통장 잔고가 문제다.
오늘의 본론, 오디오 이야기다. 한 달 전 이사하면서 오디오 시스템을 바꿨다. 꼬모 오디오(Como audio) 사의 뮤지카(Musica)라는 친구를 들였다. 우유부단을 넘어 어떨 땐 우유구(9)단인 내가 청음 하러 간 용산 전자랜드 오디오가게에서 이 친구를 보자마자 업어왔다. 비슷한 가격과 성능의 올인원 오디오 중에 독일 소노로(Sonoro) 사의 Prestige 모델도 유력한 후보였지만 뮤지카의 실물을 영접한 순간 고민이 가볍게 끝나버렸다.
가격은 90만원대. 이사를 준비하며 캠핑용품, 전자제품, 온갖 잡동사니를 당근마켓에서 처분해 번 돈과 꿍쳐놓은 용돈과 약간의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질렀다. 인터넷에서 카드 할인받으면 좀 더 싸게 샀을지 모르겠으나 영일전자 사장님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는 그냥 돌아 나올 수 없었다. 오디오 장사만 40년 하셨다는 사장님은 수천만원짜리 장비도 팔지만 그런 거 들여봐야 골치만 아프고, 아파트에선 제대로 듣지도 못한다고, 저거 하나면 게임 끝이라고 하셨다. 가져와보니 과연 그렇더라.
꼬모오디오 특유의 단단하고 또릿또릿한 소리는 웬만한 앰프 + 북쉘프 스피커 조합을 능가한다. 무엇보다 전자제품스럽지 않은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든다. 아내가 플렉스를 허락한 이유도 실은 저 튀지 않는 디자인 덕분이다. 작년에 가구 디자이너 박종선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가구처럼 생긴 이 친구를 처음 봤는데, 그때 혹했다. 내로라하는 가구 디자이너가 선택한 오디오라면 어떤 미감을 가졌을지 알 만하지 않은가.
꼬모오디오는 티볼리오디오의 창업자이자 오디오 혁신가라 불리는 Tom Devesto가 새롭게 만든 마이크로 브랜드다. 뮤지카 모델은 CDP, 블루투스뿐 아니라 전 세계 3만개 채널에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 라디오 기능까지 탑재했다. 지금 내 오디오에는 Radio Swiss Jazz, Linn Jazz, ABC Lounge Radio 등 약 20개 채널이 즐겨찾기로 등록돼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인터넷 라디오를 활용하는 방송사나 회사도 드물고, 이용자도 많지 않다. 안타깝다. 가장 안타까운 건 엉뚱한 음악을 트는 카페나 식당 같은 곳이다. 언젠가 성수동의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인근 카페를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음악 때문에 기함했다. 두 가게가 약속이나 한 듯이 폴 킴 노래만 주야장천 틀고 있는 거다. 팬들에게는 죄송하나 폴킴의 음악은 그 식당, 카페와 어울리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분위기를 깎아먹고 있었다. 아니, 커피 잘 마시고 있는데 "커피 한 잔 할래요?" 왜 자꾸 묻는 건데, 폴킴아. 차라리 가게와 어울리는 장르의 인터넷 라디오 채널을 찾아서 계속 노래를 틀어주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리라.
오늘은 이야기가 딴 길로 세는 콘셉트인가 보다. 갑자기 카페의 음악 선곡을 개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론은 이거다. 카메라건 자동차건 오디오건 악취미라는 딱지를 붙일 일은 아니란 거다. 정녕 집구석은 물론 영혼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 비트코인이나 주식보다 훨씬 건강한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겠는가. 적정한 선에서 만족할 만한 대목을 찾으면 그것이 일상을 훨씬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다. 물론 적정과 적절을 찾기 어렵다는 게 문제이긴 하다. 이놈의 자본주의는 끝없이 "지금 네가 가진 걸로는 부족해." "이렇게 개선된 기능이 있는데 안 바꾸고 버텨?" "네 옆집을 봐. 그렇게 구닥다리를 쓰고 있으면 불행해져."라고 들쑤시니까. 그래서 오늘도 3대 악취미를 가진 나는 스스로 3대 세뇌를 한다. 지금으로 충분하다, 애먼 데 눈 돌리지 말자, 통장 잔고를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