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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May 13. 2021

산에서 섬으로, 다시 산으로…고단한 서울 방랑

남산 기슭으로 이사 온지 한 달

산에서 7년, 섬에서 2년 살다가 다시 산으로 왔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는 건 아니고, 결혼 이후 서울살이에 대한 이야기다. 아차산 자락 구의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해 한참 살다가 뚝섬역 바로 앞 성수동에서 스치듯 2년을 지내고 한 달 전 남산자락 해방촌으로 이사 왔다. 성수동 살다가 해방촌으로 왔다는 말을 하면, 서울에서 가장 힙한 동네만 골라서 사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건 아니다. 나란 인간은 '힙함'과도 '힙합'과도 거리가 먼 아저씨다. 몇몇 조건을 따져 거처를 찾다 보니 이렇게 서울 복판까지 흘러들었을 뿐이다.


아차산에 두세 평 크기의 텃밭을 얻어 한 해 동안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구의동 신혼집에서는 아차산과 친하게 지냈다. 꼭대기까지 오른 적은 몇 번 없었다.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골목에 살았기에 집에서 산을 조망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집 뒤에 산이 버티고 있다는 게 좋았다. 2018년 아내가 광진구에서 운영하는 아차산 텃밭에 당첨돼서 두세 평 남짓한 땅을 일구며 여러 작물을 수확하는 재미도 누렸다. 토마토, 가지, 상추뿐 아니라 바질, 딜, 루꼴라 같은 허브도 잘 키워서 먹었다. 먹거리를 손수 수확한다는 만족감도 있었지만 우리가 키운(나는 거들기만 했지만) 식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여름날 마른땅에 물을 뿌리고 풍겨오는 냄새를 맡으며 쉬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성수동은 완전 평지였다. 산과 텃밭은 없었지만 집에서 400~500m 거리에 숲이 있었다. 서울숲. 드넓은 공원을 마치 우리의 앞마당처럼 누리며 살았다. 지난 1년여는 코로나 탓에 답답한 시절이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서울숲이 있어서 숨이 트였다고. 언젠가 덴마크 코펜하겐에 취재를 갔을 때 "모든 시민이 집에서 15분 거리에 공원에 갈 수 있도록 도시를 설계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에겐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서울이 자랑하는 훌륭한 공원이 있으니 복지 천국 덴마크가 부럽지 않았다.


성수동에서 4~6년은   알았다. 임대인(집주인) 오래 살아달라고 당부했고,  욕심도 크게 없는 분들 같았다. 그러나 1 반을  시점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임대인이 집을 팔았단다. 새로운 집주인은 우리가 2년을 채운 시점에 집으로 들어오겠다고 알려왔다. 쉬운 말로 ‘ 빼세요. 우린 임대차 3법의 희생양이  거다.   시행으로 부동산 시장이 들썩였고, 집값이 일순간 70%가량 뛰었으니 집을    없었을 테다.  집주인은 매매 사실을 알려오며 "죄송하다" 말만 되풀이했다. 집주인과  집주인을 원망하고 허술한 부동산 정책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결국 자산이 넉넉지 않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누굴 탓하겠나.

서울이 자랑하는 서울숲공원을 약 2년 가까이 내 집 마당처럼 여기며 살았다. 서울숲은 사계절 아름답지만 역시 봄이 최고다.

성수동을 떠나며 가장 아쉬운 건 서울숲과 작별하는 거였다. 그래서 이사를 앞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숲을 찾았다. 걷고 또 걸었다. 날마다 달라지는 숲의 색채를 감상했고 작은 꽃송이를 보며 감격했다. 캠핑의자를 챙겨 와 망중한을 즐겼고, 돗자리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아차산을 떠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서운하고 안타까웠다. 혼자 공원 벤치에 앉아 마음으로 많이 울었다.(내가 이렇게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임대차 3법 때문에 지난 1년간 서울의 전세 매물은 씨가 말랐다. 가격은 가격대로 오르고 좋은 집은 나오기 바쁘게 누군가 채갔다. 투기 광풍이 부는 성수동은 전셋집 구하기가 더더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레이더망을 서쪽으로 넓혔다. 아내와 나의 직장 위치를 고려했는데 용산구가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한남동의 몇몇 집도 봤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방촌의 오래된 아파트를 발견했다. 불혹을 넘긴 집은 낡을 대로 낡았지만 임대인이 '올 수리'를 해준다니 괜찮겠다 싶었다. 해방촌이라는 동네에 대해선 매력을 못 느꼈지만 이 집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안방과 작은방 창문으로 남산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한남동에 사는 회장님들이나 누리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던 남산이 낡은 아파트 창 너머로 아주 근사하게 보였다. 아내에게 말했다. "이 집으로 하자"고. 살 집을 정할 때 아내는 동네를 중시하고, 나는 집 상태를 예민하게 살피는 편인데 그런 건 따지지도 않았다. 그렇다. '남산 뷰'가 결정적이었다.


서울의 많고 많은 산 중에서 남산을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이 집을 선택한 데는 책 한 권의 영향이 컸다. 바로 일본 배우 릴리 프랭키가 쓴 자전소설 [도쿄 타워]. 나온 지는 십여 년 된 책인데 최근 중고 책방에서 사서 눈물 콧물 흘리며 읽었다. 후쿠오카 출신인 주인공이 대학 진학과 함께 도쿄 생활을 시작해 엄마와 함께 사는 내용이 나오는데 중요한 장면마다 도쿄 타워가 등장한다.

어스름한 밤, 안방 창문에서 바라본 남산. 이 모습에 반해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왔다.


"거울에 비친 도쿄 타워를 보며 미소 짓는 엄니. 창문 너머로 직접 그것을 바라보는 아부지. 그리고 그 두 사람과 두 개의 도쿄 타워를 함께 바라보는 나. 웬일인지 우리는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다. 따로따로 떨어져 살던 세 사람이 마치 도쿄 타워에 끌려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곳에 함께 있었다."


실제로 도쿄 타워를 본 적 있지만 그리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N서울타워(aka 남산타워)가 멋지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낡은 아파트 창에 비친 남산과 타워의 모습은 처음 본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릴리 프랭키가 도쿄 타워에 끌려들었다면, 나는 남산타워에 홀렸던 거다.


4월 초에 이사했는데 그때 남산은 정말 눈부셨다. 산 중턱부터 능선까지 연분홍빛 벚꽃으로 물든 모습이 그림 한 폭 같았다. 벚꽃이 진 뒤 연둣빛 신록으로 덮인 산은 또 다른 수채화였다. "남산은 가을이 최고지. 단풍이 정말 근사해"라는 지인의 말을 들었을 때는 봄날의 남산보다 더 멋진 산이란 대체 어떤 모습일까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다. 이 집에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서울사람으로서 서울의 상징인 남산을 지겹도록 볼 수 있다는 건 퍽 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면구스러운 집 자랑이 될 테다. 그러나 드라마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인생이란 훈훈한 동화 한 편보다는 줄거리를 알 수 없는 소설, 스릴러, 가끔은 아침 드라마에 가까울 때도 있지 않나. 남산 전망에 홀려 이 집으로 왔는데 도통 적응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먼저 소음. 집 바로 옆이 남산 2, 3호터널과 연결되는 7차선 녹사평대로다. 자동차 소음이 상당하다. 터널 진입로라 신호등이 없어서 차가 정말 쌩쌩 달린다. 밤마다 모터사이클 굉음으로 침대가 떨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사 초기에는 소음 때문에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가장 좋다는 문풍지를 창문 틈새에 붙여서 그나마 소음을 20~30% 줄였다.

 

일제에서 해방된 뒤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해서 이 동네 이름이 '해방촌'이다.

시간이 지나며 소음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아직까지 동네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해방촌 입구부터 집까지, 약 400m에 이르는 2차선 도로가 있다. 이 길을 따라 술집과 식당이 줄지어 있다. 특히 와인바, 펍이 많다. 손님 절반은 외국인이다. 처음엔 방콕이나 발리의 여행자거리에 온 것 같아 재미있었다. 그러나 밤늦게까지 흥청망청 노는 사람들과 시끄러운 음악소리, 길바닥에 나뒹구는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볼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진다. 해방 후 가난한 사람이 모여들었던 해방촌은 지금 청춘들의 해방구 역할을 하고 있다. 동네 분위기가 이러니 주거지로서 안정감이 들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여기선 우리가 이방인 같다"는 말을 자주 주고받는다.


윗집, 아랫집에도 외국인이 산다. 아랫집에 사는 우크라이나 여성과는 베란다 창밖으로 얼굴을 빼고 첫인사를 나눴다. 담배 연기 때문이었다. 냄새가 너무 많이 올라온다고 내가 말하자 아랫집 그녀는 "여긴 해방촌이야. 누구나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곳이야. 10년 이상 이렇게 지냈는데 아무도 뭐라고 안 했어"라며 나를 가르쳤다. 그렇구나. 내가 이 구역의 이방인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시 한번 들었다.

   

또 한 번 가슴 쓸어내리는 일이 있었다. 집 앞에 공용주차장이 새로 들어선다. 이사 준비를 할 때만 해도 부동산에서는 3층 아니면 5층 높이일 거라 설명했다. 우리 집이 6층이니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막상 공사가 시작되니 철골 높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3층, 4층, 5층까지 높아지더니 남산 전망의 상당 부분을 가리게 됐다. 어느 날 퇴근 후 눈높이까지 올라온 주차장 골조를 보고는 아내와 나는 "헐"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남산 전망이야말로 이 집을 선택한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니 심리적 내상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리 전망보다는 동네의 열악한 주차 여건을 개선하는 게 중하지 않겠냐"며 마음을 다독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차장이 남산 능선과 타워를 가라진 않는다.

단지 전망 때문이 아니다. 집 가까이에 산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서다.

"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해방촌에 사는 황인숙 시인이 최근에 낸 책 제목이다. 요즘 이 말을 자주 입에 담는다. 몇몇 불편과 한두 가지 불만거리에 집중하면 녀석들은 바이러스처럼 한없이 증식한다. 불편과 불만이 힘을 합쳐 불안을 부추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불편을 개선하되 불안에 나를 방치하지 않는 거다. 그래서 이사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살기로 했다. 작은 실천 하나로, 매일은 아니어도 틈날 때마다 남산 중턱의 소월로를 달리기로 했다. 400m 정도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야 한다. 남들은 일부러 한다는 '트레일 러닝'이라 생각하고 심장이 터질듯한 오르막길을 달리기도 한다. 두 번 달리고는 종아리 근육이 살짝 파열됐는지 마사지를 하고 파스를 붙이며 쇼를 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달릴 수 있는 산이 가까이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일 테다. 여기서 2년을 살면 서울숲처럼 남산을 사랑하게 될지,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은 동네에도 애착이 생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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