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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n 24. 2021

모든 삶은, 작고 크다… 당근이 알려준 진리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물건을 파는 이유

모든 삶은, 작고 크다.

당근마켓에서 거래를 할 때마다 루시드 폴의 앨범 제목오른다. 커피   값의 물건을 여러번 판 나는 물론 '작은 ' 쪽에 속한다. 반면 800만원짜리 달항아리도, 2000만원짜리 롤렉스 시계도 사고파는 사람있더라. 그러니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  삶도 당근 세상에 있다는 말이다. 화폐의 크기로 삶의 수준까지 판단할  있는  아닐 테다. 그러나 당근마켓을 통해 다양한 인간군상, 나아가 당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관찰할  있다는   흥미로운 일이다.


 당근 거래는 작년 8월이었다. 네이버 중고나라나 악기 거래 사이트 ‘', 카메라 장비의 메카인 ‘SLR클럽 대학시절부터 드나들었던  비하면 상당히 늦은 입문이라   있다.  거래 물건은 너무 소소해서 쓰기도 부끄럽다. 차량용 스마트폰 거치대 2개를 내놓았다. 모두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샀다. 원가가  3000원인 송풍구형 거치대를  번에 4개를 샀다. 지인에게 선심 쓰듯 나눠주려고 했는데 정작 필요한 사람이 없었다. 당근마켓에 ' 제품' '미개봉'이란 설명을 달아 제품을 올렸는데 의외로  팔렸다. 찔러보기,  보기를 하는 사람은 많았다. 아니 3000원짜리 깎아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자존심이 있어서 가격을 깎아주지 않았다. 결국 3개월이 걸려서  팔았다. 이때 깨달은 놀라운 당근 세계의 진리가 있었다. “언젠간 팔린다”. 지금까지 스무개 이상의 물건을 당근에서 팔았는데  진리는 모두 유효했다. 인내하는 자에게 ‘팔림' 임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텐트 거래였다. 9  텐트를 당근에 올렸다. 입질이 왔다. 직접 물건을 본 뒤 구매를 결정하겠단다. 그러라고 했다. 본인은 바빠서 남자친구가  테니  부탁한다고 했다. 근데 남친이 영국인이란다. 설치법만  알려달래서 그러겠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온단다. 텐트 무게가 10kg 넘는데 괜찮겠냐 물었더니 걱정 말라했다.


약속 시간, 남친이 나타났다. 건장한 친구가 특대형 배낭을 메고 있었다. 함께 빌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설치법까지 알려주겠다며 나름의 호의를 베풀었다. 어두운 밤, 아내와 함께 셋이서 낑낑대며 텐트를 설치했다. 영국 남친은 핸드폰 조명으로 구멍 난 곳이 없는지 세세히 살폈다. 흠집을 찾아내 가격을 깎거나 거래를 엎으려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한참 텐트를 살핀 영국인은 “땡큐 포 나이스 원!!”을 외치고 4만원을 건넸다. 텐트를 짊어진 영국인이 자전거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커플은 이 텐트를 가지고 소백산으로 첫 캠핑을 떠난다고 했다. 이들이 행복하게 캠핑을 즐기길, 부디 저 텐트가 오래오래 저들과 함께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지금이 전염병의 시대라는 걸 상기시켜준 거래자도 있었다. 침낭 두 개를 산 당근인이었는데 쿨하면서도 훈훈한 어른이었다. 뚝섬역 개찰구에서 만난 당근인은 50대 중반 여성이었다. 침낭 커버에 매직으로 이름을 썼다가 지운 자국이 있어서 가격을 깎거나 거래를 엎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물건을 대충 살핀 그는 “외국에서 가족이 와서 자가격리 중인데 쓸 만한 이불이 없어서요. 이 침낭, 아주 잘 쓸 것 같아요”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침낭이라면 으레 캠핑 가서나 쓰는 물건인데, 코로나 시국에는 이렇게도 쓰는구나 싶었다. 영국 남친에게 텐트를 팔 때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이 침낭이 격리 중인 가족에게 따뜻한 잠을 선물했으면, 하고 바랐다.


집중적으로 당근 거래를 한 건 이사를 앞둔 시점이었다. 짐 정리 차원에서 이사 약 한 달 전부터 온갖 살림을 당근에 올렸다. 전기난로부터 CD플레이어, 족욕기, 커피 그라인더, 요구르트 제조기까지. 다양한 물건만큼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아이디가 재미난 사람이 많았다. OO여사는 흔했고, OO마귀, 사냥개 같은 아이디도 있었다. 이름처럼 메시지에서도 공격성이 느껴졌다. 당근마켓에는 거래 상대의 후기에 따라 매겨지는 ‘매너온도'라는 게 있다. 나는 스무 개 가까이 팔고서야 37도가 됐는데 50도가 넘는 사람도 즐비했다. 그렇게 심각한 발열 상태인 당근인들은 내놓은 거래 물건이 수십개에서 100개가 넘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근이 일상이자 인생인 사람들 같았다.


당근마켓에는 유별난 사람만 모인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나도 충분히 이상하고 밥맛 없는 거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깨우친 순간이 있었다. 지난겨울, 샤오미 전기난로를 팔았다. 하마처럼 전기요금을 잡아먹는 녀석이어서 산 지 두 달만에 내놓았다. 금방 입질이 왔다. 유난히 말줄임표를 많이 쓰던 상대는 조심스럽게 네고를 요청했고 본인이 나이가 좀 있으니 설명서를 꼭 챙겨달라고 했다. 성가셨다. 샤오미 제품 처음 써보시나. 작동법이 단순해서 설명서는 따로 없고 거래하면서 간단히 설명드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5000원을 깎아줬다.


약속시간이 임박했는데 구매자는 약속 장소를 못 찾아 전철역 주변을 헤맸다. 문자 응답도 늦었다. 속으로 ‘당근 거래 한 두번 해보시나’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가 빵집 앞에서 구매자를 만났다. 어머니뻘 되는 60대 여성이었다. 그가 몰고 온 SUV 차 조수석에는 아들로 보이는 이가 있었는데 내리지 않았다. ‘난로가 무거울 텐데 아들은 왜 안 내리지?’ 생각하며 차 안을 슬쩍 봤더니 아들은 몸이 불편한, 발달장애인 같았다. 60대 구매자는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아들을 챙기고 직접 운전까지 하며, 그 와중에 당근마켓 앱으로 문자까지 주고받았으니 얼마나 정신없으셨을까. 대단히 바쁘지도 않으면서 채근하고 상대를 함부로 판단했던 내가 너무 경솔했다. 물건을 팔고서도 걱정이 됐다. 전기요금이 적잖이 나올 테니 요령껏 잘 쓰셔야 할 텐데.


당근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아본 물건은 이거다. 폴크 스피커.

어쨌거나 당근은 흥미로운 세상이다. 서로 가격으로 밀당을 하며 얼굴 붉히기도 하고 사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가격에 좋은 물건을 사고팔았다는 만족감, 아끼던 물건을 누군가  썼으면 하는 진심이 교차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인상착의를 알려주고 “혹시, 당근이세요?”라고 서로 신상을 확인하는 과정은 번거로우면서도 잔잔한 재미가 있다. 거래를 마치고 나면 후련함과 뿌듯함이 따라온다. 커피   값도  미치는 가격으로 물건을 팔더라도 내가 쓰던 물건이 버려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쓰일 거라는 사소한 기쁨 샘솟을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방을 스캔한다. 당근에 올릴 물건이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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