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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l 16. 2021

‘곶감의 고장’ 상주의 반전 매력

여름이면 떠오르는 낙동강의 웃픈 추억

아무런 기대가 없던 곳에서 의외의 경험을 하게 될 때 기억은 오래간다. 나에겐 경북 상주가 그런 곳이다. 위에서 뚝 떨어진 출장으로, 그러니까 내 의사와 무관하게 그것도 가장 더운 여름에 상주를 두 번 다녀왔다. 의외의 경험이란 게 좋은 쪽도 있었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있었으니 상주의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삼복더위가 다가오면 햇볕 피할 곳도 마땅치 않던 낙동강변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상주 하면 곶감 밖에 아는 게 없었다. 2019년 여름, 첫 상주 출장 때는 스케일에 놀랐다. 도시 대부분이 산지이기에 서울의 곱절이 넘는 면적은 체감하기 어려웠다. 스케일은 전시관을 다니며 실감했다. 상주박물관, 자전거박물관, 낙동강생물자원관 같은 시설이 농촌 산간지역 치고 모두 큼직큼직했다. 어디를 가나 답답한 구석이 없었다. 지자체 예산으로 만든 이런 시설을 보고 ‘혈세 낭비’라는 말부터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폄하할 일은 아니다. 의외로 허술하지 않았다. 다만 트렌디하지 않을 뿐 뼈대 있는 도시 상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져 흥미로웠다.

자부심의 실체를 간략히 볼까나. 상주는 전국서 유일하게 자전거박물관을 가진 도시다(라고 기사를 썼었는데 카카오 맵을 보니 부천에도 있네). 전국서 자전거 보유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상주다. 가구당 2대. 자녀가 넷인데 집에 자전거가 7대라는 상주시 공무원도 있었다(그 자전거 다 어디다 두세요?). 1925년 전국 팔도 자전거대회를 소재로 한 폭망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의 배경이 상주다. 부자가 아니면 자전거 한 대 갖기 쉽지 않던 1900년대 초부터 상주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이 많았다.

상주박물관은 사벌국면에 있다. 사벌국이라, 다소 살벌해 보이는 지명은 원삼국시대의 소국 이름이다. 상주 지역에서 융성했다가 신라에 패망했다. 박물관은 사벌국 시대의 유물뿐 아니라 상주의 양반 문화, 유교 문화도 비중 있게 다룬다. 안동, 영주, 경주 등 경북 여러 도시가 유교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데 상주도 뒤지지 않는다. 2019년 박물관에서 본 ‘영남 선비들의 여행’ 기획전은 의외로 흥미로웠다. 상주에서는 1196년부터 1862년까지, 무려 666년간 ‘낙강 뱃놀이 시모임’이 이어졌다. 학예연구사는 “큰 배에는 50명 이상 탔고, 수박 100여 덩이와 거문고·퉁소 같은 악기를 싣고 최대 나흘간 강을 유람했다”고 설명했다. 조선판 크루즈 여행이었던 셈이다.


상주는 낙동강에 대한 자부심도 남다르다. 낙동강 700리의 시점이 상주라는 걸 강조하는데, 그런 걸 몰라도 낙동강을 벗 삼아 놀기 좋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국민관광지로 조성된 ‘경천대’가 조선 선비들의 놀이터였다면, 지금 상주 관광의 심장부는 ‘경천섬’이다. 남이섬 절반 만한 섬인데 원래 모래섬이었던 걸 10년 전 공원으로 꾸몄다. 국내 최장 도보교와 수상 탐방로도 있어서 산책하기 좋다. 다만 여름은 피하는 게 좋다. 나무가 자잘해서 그늘이 드물다. 뙤약볕에 운동장을 산책하는 느낌이랄까. 아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엔 여름에 가는 게 더 좋을 수 있겠다. 정말 한산하다. 자동적으로 비대면 여행을 할 수 있다.

참고로 경천섬과 낙동강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곳은 청룡사라는 작은 절이다. 만개한 수국이 사찰과 어우러진 모습이 근사했고, 무엇보다 낙동강 전망이 기막혔다. 산 중턱 전망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낙동강과 멀리 파도 같은 산세가 한눈에 담겼다. 잘 모르는 경상도 아저씨와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고 둘이서 30분 이상 한자리에 붙들려 낙조를 감상했다. 쥑이네예, 이런 소감을 들었던 것 같다.


상주시는 낙동강을 수상레저 명소로 만들고 싶어 한다. 상주보, 낙단보에 레저센터를 만들어 카누, 패들보드, 웨이크보드 등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수량도 풍부하고 주변 경관도 좋은데, 아직 홍보가 덜 된 탓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내가 너무 더울 때만 가서인지 손님을 본 적이 없다.


너무 썰렁해서 안타까운 레저센터에서 진짜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해 여름, 드론 전문가와 함께 촬영을 갔다.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를 다니다가 꽤 오래전 독립한 까마득한 선배였다. 레저센터 직원과 강사의 협조를 받아 웨이크보드 타는 장면을 촬영했다. 쏜살같이 물살을 가르는 보더를 드론이 좇아갔다. 강줄기가 굽어져서 육안으로 안 보이는 곳으로 질주했다. 드론도 계속 따라갔다. 드론을 잘 모르지만 들은 얘기는 있었다. 아무리 요새 드론이 좋아졌다 해도 눈에서 사라지는 곳까지 보내면 안 된다고. 옆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결국 일이 터졌다.

 

“야, 신호가 끊겼다.”

아니나 다를까, 조종기를 응시하던 선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쪽 눈이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 눈빛처럼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조종을 해도 드론은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선배는 강가 나무에 드론이 걸린 것 같다며 찾으러 가보자고 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사실 이 선배와는 4년 전 강원도 양양으로 함께 출장 가서 드론을 분실했다가 찾은 흑역사가 있었다. 그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해변에서 촬영하다가 무리해서 먼곳까지 드론을 날렸다가 야산 소나무에 걸린 것을 천신만고 끝에 되찾았다. 군청, 면사무소, 소방서 등 온갖 곳에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손사래를 쳤다. 결국 산림청에서 빌린 대형 새총으로 드론을 격추해서 찾아냈다. 그때도 한여름이었다. 늦은 밤까지 야산 무덤가에서 모기 떼에게 값진 피를 헌납하며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드론 실종 지점으로 추정되는 장소.

“지도로 대략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 찾으러 가보자.”

왜 또 나란 말인가. 세상에 이런 잔인한 평행이론이 있나. 길도 없는 야산에서 덤불 속을 헤매며 또 모기 밥 신세가 됐다. 드론이 사라진 위치를 경찰견처럼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4년 전과 달리 드론 실종 지점이 가파른 벼랑이어서 선배도 더 이상 무리하지 않았다. 무리수로 생긴 사태였지만 무리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드론은 낙동강에서 익사한 것 같았다. 선배는 4년 전 그 드론보다 저렴한 녀석이라며 짐짓 괜찮다고 했다. 부주의한 조작으로 이런 사태를 만들고 모기 밭으로 나를 이끌고 간 선배가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자식 같은 드론과 생이별한 심정은 어땠을까 싶었다. 아깝고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드론을 사야 할 필요를 종종 느낀다. 하지만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굳이 뭘’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아니, 드론 전문가라는 양반도 저렇게 자주 사건사고를 겪는데.


더위에 시달리고, 드론 분실 사건으로 학을 뗐지만 상주라는 도시가 질리진 않았다. 올봄에는 아내 덕에 상주에서 잊지 못할 음식을 맛보기도 했다. 경주로 벚꽃을 보러 가는 길에 잠시 상주시내에 자리한 '살롱드봉강'이란 피자집을 찾아갔다.

얼마 전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도 출연했는데 사실 상주 사람도 피자집인지 잘 모르는 곳이다. 간판도 없고 하루에 피자도 딱 10판만 예약받아서 팔기 때문이다. 서울서 인디 밴드를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피자를 굽는 주인장의 사연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피자가 진짜 맛있다. 요새 유행하는 나폴리 정통 피자도 아니고, 한 조각만 먹어도 물리는 배달 피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무국적, 아니 상주식 피자다.


유기농 지역 식재료를 이용해 피자를 만드는데 신선한 재료 각각의 맛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예약시간 30분 전에 재료를 하나씩 손질해서 피자를 준비한다. 채소를 다듬고 고기를 볶고 토마토 페이스트를 졸인 뒤 잘 발효된 피자 도우에 재료를 하나하나 얹어 굽는다. 세상에 이런 슬로푸드가 없다. 빵은 퍼석퍼석 힘없이 주저앉지 않고 치아바타처럼 쫄깃쫄깃한 식감이 살아있다. 피자를 썩 즐겨 먹지 않는데도 이 피자는 게눈 감추듯 먹어버렸다.


오늘 글은 너무 두서없는 의식의 흐름 같다고? 자전거 얘기하다가 사벌국, 낙동강으로 흐르더니 드론 분실 사건 다음에 피자까지. 좀 그렇긴 하다. 그러나 이 맛난 피자야말로 상주를 또 가고 싶게 만드는 것이니 이렇게 의식이 흐르는 게 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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