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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Jul 27. 2021

즐겨찾기 목록에서 카페 한 곳을 지웠다

커피 마시다가 '꼰대 되지 않는 법'을 배운 사연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면 꼭 괜찮은 카페를 찾아간다. 어떨 땐 커피가 여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커피 덕후로서 즐겨찾는 카페가 전국 각지에 있다. 그런데 이틀 전, 강원도 모처에 있는 한 곳을 목록에서 삭제했다. 1년 새 3번을 찾아갔던 곳인데 요새 말로 완전히 ‘손절’한 것이다.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는 퍽 감탄했다. 다분히 문학적인 카페 이름부터 외진 산골이라는 독특한 입지, 아늑한 느낌의 목재 인테리어, 진공관 앰프를 거쳐 빈티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느릿느릿한 음악까지. 여러 면에서 감성을 터치하는 구석이 많았다. 다만 주말이어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입구부터 계단까지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는 그냥 발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워낙 먼길을 달려왔기에 대열에 합류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내내 러시아 소설을 낭독하는 라디오 방송이 나왔다. 셀카를 찍느라 음악 따위에 관심 없는 청춘도 있었지만 손님 대부분이 차분한 성우 목소리에 집중하며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SNS에서 핫한 카페 치고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다만 커피 맛은 인상적이진 않았다. 긴 대기 시간과 더운 날씨 탓에 커피 맛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어쨌거나 한 번은 와볼 만한 이색 카페라고 생각했다.

본문 내용과 전혀 상관 없는 강원도 어느 산속 연못.

올해 초 스키를 타러 강원도에 갔다가 이 카페를 또 한 번 찾았다. 지난여름과 달리 평일이었고 눈발도 제법 날리던 겨울이었던 터라 카페는 한산했다. 손님은 우리 부부와 다른 한 테이블뿐이었다. 카푸치노를 마시며 주인과 느긋하게 대화도 나눴다. 음악과 여행, 산골살이의 재미 등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훈훈한 시간을 보냈다. KBS 클래식 채널 프로그램인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 애청자라는 공통점이 대화를 더 풍성하게 해줬다. 창문 너머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감상하며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했다. “비수기여서 여유롭고 좋네. 다시 오길 잘했다” 아내와 카페를 나서며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최근, 거의 반년만에 이 카페를 다시 찾았다. 지난 두 번의 방문과 달리 이번에는 내가 가자고 했다. 경북 영주에서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이곳까지 찾아간 건 물론 지난겨울의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은 아닌데다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까지 겹친 탓인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카페 안에 빈자리가 많은데도 아내는 한사코 야외 벤치에 앉자고 했다. 바깥은 너무 덥다고, 안에서 음악도 들으면서 커피도 마시자고 아내를 설득해서 자리를 잡았다. 구석 자리로 가자는 아내의 말을 또 뿌리치고 구태여 주인장이 커피 내리는 모습을 보겠다며 바(bar) 자리에 앉았다.


음료를 주문하고 인사를 나눴다. 세번째 방문이라고 강조했는데도 주인장은 나를 못 알아봤다. 그럴 수 있지. 내 외모가 독특한 것도 아니고 핫한 카페를 운영하다 보면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할 테니. 잠시 후 나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도화선에 불을 댕기고 말았다. 오디오에 대해 물어본다면서 쓸데없는 말을 흘렸다.

“앰프가 좋아 보이네요. 저는 아파트에 사는 터라 음악을 크게 들을 수 없어서 올인원 오디오에 만족하고 있습니다만…”


주인장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일장 훈시가 시작됐다. 쉴 새 없이 말 펀치를 얻어맞았는데 몇 마디만 옮겨보겠다.

“듣고 싶은 음악 하나 제대로 못 듣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참 딱합니다. 집값 오르기만 기대하면서 아파트 살면 불행한 것 아닌가요. 사람들은 원하는 삶을 선택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용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행복하게 살 줄 모르는 거예요. 행복하려면 지금 누리는 걸 포기해야 하는데 다들 그걸 못합니다. 그게 다 욕심이고 욕망입니다.”


오디오 얘기나 하려고 했는데 행복론을 설파하시니 당혹스러웠다. 바닥을 드러낸 커피 잔을 괜히 홀짝이고 있는데 속사포 같은 말 펀치가 이어졌다.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에 살아야 행복합니다. 커플 손님이 있었는데 결혼하거든 꼭 주택에 살라고 얘기해줬죠. 곧 그들은 결혼했고 서울 외곽에 근사한 3층짜리 주택을 지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못 간 유럽 신혼여행 비용 일부로 오디오를 장만했답니다. 1500만원 정도 들었다나. 아주 잘했다고 이야기해줬습니다. 이 부부처럼 집을 지어야 음악도 원 없이 듣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손님도 주택으로 가십시오. 서울에서 산다면 외곽에 어지간한 주택 하나 구할 수 있습니다.”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저... 전세 사는데요? 그것도 빚이 절반이고요, 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그냥 하나만 물었다.

“그러니까 사장님도 음악 편하게 들으려고 이런 산골로 오신 거예요?”

주인장은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약간의 손짓을 섞어 말했다.

“음악을 포함한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서 온 거죠.”


거창하게 행복론을 늘어놓은 어른에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대단히 멋지시네요’ ‘부럽네요' 같은 말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내는 조용히 ‘가자'라며 먼저 일어났다.


괜히 이 카페를 오자고 하고, 하필 바 자리에 앉고, 또 하필 오디오 얘기를 던진 내가 미안했다. 일장 훈시를 끊지 않고 들어준 것도 후회스러웠다.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려들을 개똥철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런 게 아니었다. 조금 유별나 보이지만 사실은 무개념하고 편협한 기성세대의 민낯을 본 거였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꼰대는, 직장에만 도시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산골에서 자연인처럼 누구나 부러워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 같아 보여도 얼마든지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아파트에 살면 다 속물이고, 욕망의 노예인가? 요즘 젊은 사람들의 현실을 1도 모르면서, 주택을 지으라고? 1500만원짜리 오디오? 직장 관두고 시골 가서 살면 다 행복해?" 차안에서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이것도 상관 없는 커피 이미지. 강원도 모처의 호텔에서 찍었다.

카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소심한 복수를 하고자 글을 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순간을 돌아보며 나는 어떤 어른이 돼야 하나, 아니 절대 돼서는 안 될 ‘어른상'은 무엇인가를 기억해두기 위해 쓰는 것일 따름이다. 사건(?)을 계기로 몇 가지 다짐한 것도 있다. 남에게, 특히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함부로 조언하지 말자는 것. 늙을 때까지 ‘내가 모르는 게 참 많다'는 태도를 유지하자는 것. 자기 멋에 취해 사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 시대 문제에 공감할 줄 아는 어른이 돼야겠다는 것. 결국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할텐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사건(?) 겪고 보니  집을 다시 가지 말아야  이유가 명확히 보였다. 물론 주인장의 태도가 결정적이다. 카페 곳곳에 붙어 있던 ‘좋은생각'류의 글귀들도 따지고 보면 어떤 식의 강박인  같아 묘하게 불편했다.  하나의 결정타. 커피 맛도 별로였다. 핸드드립 커피치고는 풍미가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커피 산지와 상관없이 하나 같이 향은 빈약하고 맛은 납작했다. 카푸치노는 거품이 낙제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사온 드립백 커피를 내려 마신  차라리 맛있었다. 그래 이젠 커피 한잔 마시러 산골까지 가지는 말자. 커피가 뭐라고, 커피가 뭐길래.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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