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하나가 바꾼 지역의 인상
세상은 너무 시끄럽다. 그리고 인간은 소음을 만드는 기계다. 내 독자적인 생각인지, 엄마가 나에게 주입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거의 맞는 말인 것 같다. 엄마는 조용한 세상을 꿈꾸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인 것 같다. 꿈을 이루지 못한 엄마는 점점 망가져 가고 있다.
엄마를 괴롭혔던 윗집과 아랫집 모두 이사를 하는 것으로 층간소음은 사라졌는데도 엄마는 자꾸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정소현, [가해자들] 부분
층간소음을 소재로 한 소설을 단숨에 읽었다. 볼까 말까 망설였던 까닭은 내가 층간소음에 시달리고 있어서였다. 소설 주인공처럼 환청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웃과 불화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한 편이라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어쨌거나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같은 소설이다.
지난 3월, 부동산 중개인이 오래된 아파트일수록 튼튼히 지어서 소음 걱정 말라고 했는데 이사 온 지 다섯달 된 아파트는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윗집 사람 걷는 소리, 부부 싸움 소리, 아랫집 오디오 소리, 옆집 TV 소리가 벽을 타고 우리 집으로 스민다. 이게 다가 아니다. 집 바로 앞에 7차선 대로가 있어서 오토바이, 화물차 굉음도 상당하다. 남산 뷰에 홀려서 선택한 집은 눈은 즐거우나 귀가 괴로워 애정이 생기려다가도 만다. 물론 우리 집 생활소음도 어디론가 흘러갈 테다.
소음 이야기를 꺼낸 건 얼마 전 여름휴가 생각이 나서다. 휴가 때 숙소 선택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긴다. 나는 딱 한 가지만 당부한다. 조식 안 나와도 되고, 전망 별로여도 괜찮으니 조용하고 아늑한 곳으로 찾아달라고. 내 성향을 나만큼 잘 아는 아내는 두어달 전 경북 청도에 있는 어떤 숙소를 예약했다. 방 잡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는데 마침 누군가 우리 휴가기간에 딱 맞춰 취소를 했다. 청도라, 소싸움 말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는 동네였지만 아내는 “딱 자기 스타일 숙소니까 기대해도 좋아”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감나무가 지천인 좁은 산길을 한참 들어가니 단정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이웃집과 거리가 50m는 떨어진 입지부터 마음에 들었다. 민박집주인의 환대를 받으며 짐을 풀자마자 아내가 가장 먼저 물어본 건 강아지 산책시간이었다. 이 숙소는 손님이 원하면 아침이나 오후에 강아지와 산책을 하도록 해준다. 옵션 투어라고나 할까. 물론 추가 비용은 없다.
오후 6시 강아지 두 마리와 산책에 나섰다. 붙임성 좋고 씩씩한 아이들과 숙소 주변 산길, 마을길을 슬렁슬렁 걸었다. 3년차 귀농 부부의 정착기와 시골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산책하다 마주친 황혼은 무척 황홀했다. 이튿날도 강아지와 함께 동네 마실을 나갔다. 침을 질질 흘리며 흥분한 강아지보다 우리가 더 신난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선풍기 강풍 속도로 회전했을 테다.
둘이 지내기에 다소 큰 편이었던 독채는 곳곳에 주인의 섬세함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불어로 ‘평안, 정적’을 뜻하는 숙소 이름 ‘키에튀드(quietude)’에 걸맞게 아늑하고 평온했다. 깊은 밤 풀벌레 소리, 이른 아침 조잘거리는 새 소리 외에는 완전한 적막 속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자연의 소리는 신비하게도 기계나 사람이 내는 소리와 달리 깊은 평안을 준다. 물론 멧돼지 달려오는 소리, 고라니 우는 소리는 좀 무섭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으로 숙소 앞 나무데크를 꼽을 수 있겠다. 가로 세로 약 5m 길이의 제법 널찍한 데크에서 캠핑 의자에 앉아 한가함을 만끽하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겹겹 산 능선을 망연히 바라보며 아침을 먹었고 오후에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신선한 청란과 풋사과를 탁 트인 자연을 보며 먹으니 어떤 특급호텔 조식 뷔페도 부럽지 않았다.
저녁에도 데크에 앉아 사위가 적막에 잠겨가는 풍광을 가만히 바라봤다. 여러 소음에 시달리는 입장에서 가장 간절했던 순간은 바로 이런 것이었을 테다. 나도 집을 짓는다면 널찍한 데크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공간이라면 권태로움과 심심함도 빛나는 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생각만 해도 좋다.
다락방에서 차분히 음악 듣는 시간도 소중했다. 60년대 미국 고급 빈티지 스피커는 핸드폰 스트리밍 음악도 중후하게 포장해줬다. 빔 프로젝터도 있어서 노트북을 연결해 넷플릭스를 보기도 했다. 아늑한 숙소와 어울리지 않게도 해양 생태 파괴에 대한 고발 다큐린 '씨스피러시'를 봤다. 사실 이런 다큐멘터리를 보기에 적합한 때와 장소라는 게 따로 있진 않을 테다. 참고로 숙소 주인 분의 영화 취향도 재미있더라. 씩씩한 성격의 아내 분은 '파이트 클럽'이 인생 영화란다. 다음에 숙소를 다시 찾으면, 데이비드 핀처 영화에 대해 환담을 나눠봐야겠다.
숙소에서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강아지들과 산책한 것 말고는 청도에서 한 게 없었다. 나중에는 너무 한 게 없다 싶어서 청도의 대표 관광지인 운문산 쪽을 가보긴 했다. 휴양림과 운문사 산책로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운문호 수변 산책로였다. 호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산책로 전망도 근사했다. 운문사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가을 풍광이 압도적인데 운문호 봄 풍경도 만만치 않을 것 같더라. 운문호 도로변에 벚꽃이 만개할 4월, 청도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지역의 인상이란 건 사소한 게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청도가 그렇다. 지역을 확실히 브랜드화 한 '청도 소싸움 축제'는 동물권이 화두로 떠오른 요즘 도리어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나도 청도 하면 무자비한 동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청도군민 중 몇 명이나 소싸움과 관련된 일을 하겠으며 드넓은 청도군에서 소싸움 경기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겠나. 어쨌거나 ‘청도군’은 '호감 군'에 있던 동네가 아니었는데 좋은 숙소 덕분에 인상이 바뀌었다. 이런 인상의 전환도 사실 수많은 필요충분조건이 맞물린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시 층간소음, 생활소음에 시달리는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알겠다. 아늑하고 고요했던 늦여름 산골의 밤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