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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Feb 10. 2021

고추장만큼 깊고 진한 강천산의 맛

계절의 맛 - 겨울

겨울이면 어김없이 설경을 잡으러 떠난다. 주로 강원도 산간지방이나 한라산, 울릉도 성인봉 같은 다설 지역을 찾아간다. 험한 산을 올라가 드라마틱한 순백의 설산을 만난 이야기를 기사로 푼다. 여기서 중요한  고생이다. 그냥 고생이 아니라 고생고생 생고생이어야 한다. 아무리 서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 해도 동네 공원이나 뒷산을 취재할  없는 일이다. ‘ 기자' ‘진정한 여행기자'라면 독자로 하여금 ‘날로 먹었다’ ‘ 정도는 기사는 나도 쓰겠다 댓글을 달고 싶게 하면 안된다.


올겨울은 이상했다. 강원도에 눈가뭄이 이어졌다. 제주도와 울릉도에는 많은 눈이 내렸지만 갈 상황은 아니었다. 대신 호남 지역에 몇 차례 폭설이 집중됐다. 부안, 고창, 순창, 담양을 후보지로 놓고 저울질했다. 꽤 오랫동안 기사를 쓰지 않았던 순창으로 낙점. 차를 몰고 남쪽으로 내달렸다.

순창읍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 점심을 먹고 함께 강천산으로 향했다. 강천산은 순창사람들의 자부심 서린 산이다. 한국 최초(1980년)의 군립공원이기 때문이다. 국립도 도립도 아닌 ‘군립’이 된 건 사이즈의 문제였다. 경치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데 산이 아담하다. 국민이나 도민이 찾아올 정도는 아니고, 군민이 즐기기에 딱 적당한 산이라는 뜻일까. 어쨌거나 강천산은 호남을 대표할 만한 산이다. 특히 단풍이 빼어나다. 순창군에 따르면 방문객의 70%가 가을에 집중된다. 그러나 겨울 풍광이 가을 못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 해설사가 강조했다. 감사하게도 취재하기 전부터 기사 제목이 뽑혔다. 순창 사람만 아는 강천산의 겨울 진풍경. 너무 식상한가.

꽁꽁 얼어붙은 구장군폭포. 높이가 120m 정도라는데 글쎄...

강천산은 등산객에게 도전감을 불러일으키는 산은 아니다. 높이가 583m에 불과하다. 공원 입구부터 계곡 안쪽 구장군폭포까지 왕복 2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평지 수준의 산책로가 있다. 굳이 산꼭대기를 안 올라가도 계곡따라 걷다보면 웬만한 절경을 다 만난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다섯살 꼬마도, 팔순 어르신도 뒷짐 지고 다녀올 만하다.


취재 일주일 전에 내린 눈이 다행히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금방 쌓인 눈을 뽀득뽀득 밟는 맛은 없었지만 계곡에는 캐시미어 이불처럼 눈이 도톰하게 덮여 있었고, 얼어붙은 폭포는 하늘색으로 반짝이며 오싹한 겨울 느낌을 더해줬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하려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주력으로 쓰는 렌즈가 먹통이었다. 응급처치도 통하지 않았다. 다행히 화각이 넓은 광각 렌즈가 하나 더 있었다. 아쉬운 대로 이거 하나로 써야 했다. 어째 시작이 좀 불길했다.

느긋하게 산책로를 걸으며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비록 인공폭포이긴 하지만” “비록  나무들이 심은  얼마  되긴 했지만" 이런 설명이 유독 많았다. 그러니까 자연미가 아주 빼어난 산은 아니란 뜻으로 이해했다. 유치한 동물 조각과 포토존 같은 조형물이 툭툭 튀어나오긴 했어도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그 모든 촌스러운 컬러의 조형물을 흰눈이 가려주고 있어서였다. 천년고찰 강천사도 둘러보고 1980년에 만들었다는 구름다리도 걸어봤다. 진짜 두시간만에 어지간한 명소는  둘러봤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면   일이었다. 강천산을 가본 독자들에게 ‘날로 먹었다' ‘ 정도 여행기사는 나도 쓰겠다' 말을 들을  없었다.


“산 꼭대기든 경치 좋은 봉우리든  좋습니다. 어디든 한 군데 올라보고 싶습니다.”

나의 제안에 해설사는 신선봉 팔각정으로 안내했다. 계곡길과 달리 등산로에는 눈이 발목 높이 만큼 쌓여 있었다. 아이젠(신발에 덧신는 스파이크)을 장착했다. 팔각정까지는 나무계단이 깔려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각도였다. 보통 등산로는 오르내릴 때 너무 부담스럽지 않도록 내는데 이 계단은 스키장 최상급 코스에 맞먹는 경사였다. 귀찮았던 걸까, 우리 국민 아니 순창군민의 유산소 운동 효과 극대화를 고려한 걸까. 계단 백개 정도 오를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해서 난간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나중에서야 카카오맵을 보니, 계단은 하필 등고선이 가장 촘촘하게 붙은 곳을 관통했다.

팔각정에 도착했다. 촘촘한 등고선을 뚫고 오른 보람이 있었다. 500m급 산치고는 제법 드라마틱한 풍광이 펼쳐졌다. 오호라, 한국 1호 군립공원의 위용이여. 정확히 ㄷ자 모양의 산세가 웅장했고 눈 덮인 강천사도 그림 같았다.

산을 오를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성취감과 함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답답하고 정신 없는 도시, 하늘을 가로막은 빌딩들은 싹 사라지고, 롯데월드타워보다 높은 하늘에서 쐬는 상쾌한 공기가 오장육부를 씻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재든, 등린이 산린이(등산 초보)든 한국인이라면 산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순창읍내로 돌아왔다. 해설사가 추천해준 주민 맛집에 대한 기대가 컸다. 여긴 전라도 아닌가. 게다가 고추장의 성지 아닌가. 순창에는 고추장마을도 있고, '장류로'라는 길도 있다. 하찮은 찌개와 백반도 비범한 맛을 내는 동네다. 한데 소개 받은 다슬기수제비집, 순댓국집, 백반집이 모두 문을 닫았다. 대부분 연세 지긋한 어머니들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연말 바이러스 확산 때문에 모두 영업을 쉬고 있단다. 하릴없이 숙소 근처를 배회하다가 갈비탕집으로 들어갔다. 식당에선 주인 아저씨가 동네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언뜻 들려오는 이야기.

“어째, 좀 살 만 한가?”

인자는 더이상 버티기도 힘드네이.”

아름다운 순창의 설경을 찾아 왔건만 코로나의 음험한 기운은 시골 마을 구석구석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식당 귀퉁이에 앉아 조용히 갈빗대를 뜯었다. 고기가 유난히 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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