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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Feb 24. 2021

순창에 눈 퍼붓던 날

계절의 맛 - 겨울

https://brunch.co.kr/@gipsyboy/8

지난 번 1편에 이어지는 글.


식당 못지않게 순창읍내의 모텔 분위기도 을씨년스러웠다. 주차장에 내 차 한 대뿐이었다. 하룻밤 4만원짜리 모텔이었는데 의외로 객실은 아늑했다. 낡은 여관 느낌이 감돌았지만 아담한 욕조도 있었고, 침대에 깔린 전기장판이 '취침 모드'로 돼 있어 훈훈했다. 땀에 쩔고 추위에 언 몸을 씻은 뒤 TV를 보며 잠 오길 기다렸다. 집에 있는 아내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서울에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싸목싸목 눈이 참 예쁘게도 내리는데 아내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왠지 더 애틋했다. 역시나 눈은 사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준다.


정확히 2시간 뒤, 순창에도 눈구름이 찾아왔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강풍까지 몰아쳤다. ‘내일 어떻게 집에 가지?’ 걱정과 함께 ‘강천산에 다시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실 이날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부신 설산이라 하기엔 눈이 충분하지 않았다. 신설에 덮인 산이 훨씬 근사한 건 당연하지 않겠나.

늦은밤이었지만 염치를 무릅쓰고 순창군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제 차는 사륜구동도 아니고, 겨울용 타이어도 아니거든요. 스노우 체인도 없어요. 관용차량으로 함께 가주시면 안 될까요? 이게 다 순창군 멋지게 소개하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따, 내일 그림은 나오겄네요이. 그라믄 일단 군청에서 만나십시다.”

쾌재를 외쳤다.


공원 초입,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줄지어 있다. 눈발 날리는 순간을 포착!!

다음날 아침, 순창읍내는 온통 하얀 이불을 덮어쓴 듯했다. 적설량은 약 20cm. 군청 직원 차를 타고 강천산을 다시 찾았다. 관용차량도 아니었고 사륜구동 차도 아니었다. 그래도 걱정 말라며 체인을 감고 공원 안쪽까지 들어갔다. 이게 웬 일. 무리해서 조금 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사달이 나고 말았다. 차가 얕은 내리막에서 눈구덩이에 빠져 앞으로도 뒤로도 못 움직이는 상황이 됐다. 공원 직원들의 도움도 받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보험사 견인차를 불렀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삽으로 바퀴 주변 눈을 치워봤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기자란 이렇게 민폐를 끼칠 때가 많은 참 얄미운 존재다.

구름다리에서 내려다본 풍경.

넋 놓고 견인차만 기다릴 순 없었다. 군청 직원에게 주변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설경을 내려보고 싶어 구름다리를 찾아갔다. 가는 길이 험하진 않은데 새로 쌓인 눈에 한 주 전 쌓여 있던 눈까지 더해 정강이까지 푹푹 잠겼다. 기대했던 대로 강천산은 눈부셨다. 하루 전만 해도 꺼뭇꺼뭇했던 절벽과 나무 줄기마저도 모두 하얀 물감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한 줄, 새빨간 구름다리만 빼고 온 세상이 하얀색이었다. 역대급이란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강천산의 설경은 한라산, 울릉도 성인봉 아니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도 뒤지지 않다고 느껴졌다. 이 양반, 뻥이 심하시구먼. 비난해도 할 수 없다. 인간의 기억이란 언제나 뒤죽박죽이고, 가장 최근 기억이 생생한 것 아니겠나. 어쨌거나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풍광이었다.

구름다리 위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풍경. 빨간 구름다리 하나 빼고 온통 흑백 세상이다.

열심히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사이 견인차가 눈구덩이에 빠진 차를 끌어냈다. 공원을 빠져나가 군청 앞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유난히 짜장 양념이 달큰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 어제 눈 때문에 서울 교통이 마비됐다는 뉴스를 봤다. 어떻게든 퇴근시간 전에 도착해야 했다. 한데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순창에서 전주까지 이어진 국도의 한 차선이 전혀 제설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문제가 또 있었다. 국도변 풍광이 근사해도 너무 근사했다. 어제 해설사가 그토록 자랑하던 27번 국도였다. 순창~임실~완주~전주로 이어지는 길, 국도변 산세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눈까지 덮어 썼으니 더 눈부셨다. 도저히 가속 페달을 힘껏 밟을 수 없었다. 물론 눈길이라 무섭기도 했고.


수시로 차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급하게 카메라를 만지다가 멀쩡하던 렌즈를 떨어뜨렸다. 1박2일 취재 일정 동안 렌즈 두 개를 해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렇게 황홀한 국도 풍경을 언제 또 보나 싶었다. 27번 국도는 벚꽃 피는 봄이 최고라는 해설사 말이 생각났다. 4월에 다시 순창을 가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물론 다슬기 수제비도, 푸짐한 순댓국도 먹어봐야 할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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