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이맘때, 지인들과 소백산 눈꽃 산행에 나섰다. 이따금 산을 타는 사람은 단 두 명뿐, 나머지 4명은 산을 오른 게 언제인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산린이(등린이라는 말도 많이 쓰던데, 어감이 좀..)였다. 그런데도 모두 겨울 산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었다. 아이젠을 신고, 스틱을 팍팍 찍으며 설산을 올라보고 싶다는 이가 있었고, 눈꽃에 대한 로망을 가진 이도 있었다. 적당한 난이도, 수도권에서의 거리 등을 감안해 소백산을 가기로 했다. 그나마 등산 경험이 조금 많은 편인 내가 코스를 고르고 어쩌다 리더 역할까지 맡게 됐다.
천동계곡 코스를 선택했다.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보니, 난이도는 '중'으로 나와 있었다. 경북 영주 쪽보다는 충북 단양 쪽이어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었다. 가본 코스는 아니었다. 전국의 산을 동네처럼 꿰고 있는 지인에게 전화해 물어보기도 하고, 블로그 산행 후기도 뒤져봤다. 무엇보다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꼼꼼히 살폈다. "잘 정비된 쉬운 난이도의 소백산 대표 탐방 코스"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심지어 "별다른 산행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코스"라는 설명까지 달려 있었다. "겨울에는 안전장비를 꼭 갖추라"는 부연이 있었지만 방점은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다'는 쪽에 찍혀 있는 느낌이었다. 출발지점에서 정상까지 6.8km, 편도 3시간. 이 정도면 해볼 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천동계곡 코스 초입. 경사가 완만해 콧노래 부르며 걷기 좋다. 아직까지는...
오전 9시 30분. 다리안 국민 관광지에 일행이 집결했다. 등산 스틱이 없어서 스키 폴을 가져온 이, 방수 방풍 기능이 전혀 없는 사파리 재킷을 입고 온 이, 내가 왕년에 산 좀 타봤는데 굳이 스틱은 없어도 된다는 이까지. 너무 준비가 허술한 것 아닌가, 걱정이 몰려왔다. 처음으로 결성된 소림축구 팀이 저리 가라 할 만한 오합지졸이 여기 있었다.
날씨가 포근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문대로 천동계곡 코스 초반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노닥거리며 설렁설렁 걸었다. 해발 1000m에 위치한 천동쉼터까지는 그야말로 나들이 즐기듯 걸었다. 김밥을 까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해발 1000m 너머의 세계로 입성할 준비를 했다.
해발 1000m를 돌파하자 거짓말처럼 상고대가 나타났다. 비로소 설산에 들어온 기분.
해발 1000m라는 것을 산도 알고 있었을까. 신기하게도 쉼터 위쪽부터 상고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 여기서 상고대가 뭔 말인지 잠깐 TMI 타임. 상고대는 상당히 고고한 대학교 이름도 아니고, 고산지대에서 날씨를 관측하는 기상대도 아니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 한자인 줄 알았는데 순우리말이다. 서리가 나무에 얼어붙은 걸 말한다. 일교차가 큰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상고대다. 한자로는 수빙(樹氷)이나 무빙(霧氷)이라 쓴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다. 그러니까 눈이 쌓여서 나무에 덮인 게 아니다. 그건 그냥 눈이지.
어쨌거나 해발 1000m 아랫쪽의 칙칙하고 거무튀튀한 풍광과는 사뭇 다른 눈부신 세상, 비로소 설산에 들어온 것 같았다. 눈도 제법 쌓여 있었고 경사도 가팔라졌다. 복숭아 뼈 높이까지 신발이 푹푹 잠겼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천동삼거리를 지나자 하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부 바람이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바람은 처음입니다. 각오 단단히 하세요." 하산객의 얼굴은 흡사 에베레스트 등정을 마치고 온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천동삼거리에 이르니 시야가 트였다. 키 큰 나무는 사라지고 고사목과 허리 높이의 철쭉 군락이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이어 부드럽고도 장쾌한 정상부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동계곡뿐 아니라 다른 코스로 올라온 이들이 정상인 비로봉을 향해 진군했다. 흡사 경부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로 빨려드는 자동차의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과연 정상부 능선의 바람은 자비 없는 회초리처럼 매서웠다. 비로봉에서는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였다. 체감 기온을 두세배 떨어뜨릴 정도로 어마어마 무시무시한 바람이었다. 복장이 허술한 일행은 안색이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이러고 놀아보기도 했다. 정상부의 칼바람을 맞기 전까지는..
하산 길, 오후 햇살에 상고대가 모두 녹아버렸다. 오르막길에 만났던 환상적인 눈꽃과 정상부의 강물 같은 산세를 되새기며 갈빛 세상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정상부가 추웠는지 하산을 했는데도 가방속 남은 김밥과 물은 냉동식품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꿈 한 편 꾼 것 같았다.
소백산을 다녀온 뒤로 일행 중 누구도 겨울산을 다시 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어설피 덤볐다가 호되게 당해서였을까, 코로나 때문일까. 여튼 눈맛, 바람맛이 조금 그립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