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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Nov 25. 2017

'산'에 다녀왔어요

뮤지엄 산 방문기

 산으로 떠난 날

 눈이 온다고 했다.

 일기예보에서는 5mm 정도라고 했으나 내가 지금부터 가려고 하는 곳은 무려 강원도 하고도 원주시. 일기예보에서 흩뿌린다고 했던 눈이 강원 산간에서는 폭설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는가.

 하지만, 하늘은 쾌청했다. 체감온도도 생각보다는 따뜻했다. 올 가을은 유난히도 흐린 날이 많았는데 모처럼 하늘은 쨍한 파랑에 흰 구름. 

 오늘 여행의 콘셉트는 짠돌이. 왜냐하면 오늘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의 입장료가 무려 2만 8천 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천에서 원주까지 통행료와 기름 값까지 계산하면 하루 문화생활비로 이래저래 꽤 거금이 들어간다. 혹시나 회원 할인이 없을까 찾아봤지만, 평생회원이 300만 원. 내가 이곳을 100번씩이나 방문할 것 같지 않아서 패스. 느지막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통, 생강차 한 통, 귤 세 개를 가방에 담았다. 점심은 휴게소에서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때우고 대신 저녁은 푸짐하게 먹어야지.

 목적지까지는 앞으로 1시간 30분.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잠시 머물러야 하니 넉넉잡고 12시에는 도착하리라.

 고속도로가 막힌다. 이 도로는 여간해서 막히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사고다. 아니나 다를까, 세 번의 사고를 목격했다. 사고 현장을 지날 때마다 고속도로는 어김없이 정체. 정신 차리자. 과속 금지, 차 간 거리 확보. 예감이 별로 좋지 않다. 도로가 뻥 뚫렸다고 긴장 풀지 말고 조심 또 조심.  내비게이션이 예고한 1시간 30분의 시간은 어느새 고무줄처럼 늘어나 총 세 시간여의 긴 여정이 되고 말았다.

뮤지엄 산

 오늘 가려고 하는 산은 원주 오크밸리에 있는 '뮤지엄 산'이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과 작품이 있다고 했다. 지난번 검색했을 때는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예약을 해야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예약 시스템은 없어진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전시는 <종이 조형전>과 <제임스 터렐> 전. 종이 조형전은 미술관 티켓을 끊으면 볼 수 있고, 제임스 터렐전은 예약 없이 30분마다 선착순으로 28명씩 입장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이 모두를 보려면 28,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뮤지엄 산은 원주 오크밸리 안에 있다. 초겨울의 스산함이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산 한가운데 산이 있었다. 말라가는 억새와 흰 자작나무가 먼저 나를 맞이했다. 서원주 톨게이트를 지나 오크밸리로 오는 길목에서 봤던 흰 자작나무였다. 

 뮤지엄 산은 티켓을 구입하는 웰컴센터를 시작으로 조각정원, 워터가든, 뮤지엄 본관, 스톤 가든, 제임스 터렐관의 순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제임스 터렐관은 이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입구에서 십여 분을 걸어야 도착한다. 나는 한 시 10분쯤 뮤지엄 입구에 도착했고, 한시 30분 관람을 신청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도록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웰컴센터에서 플라워가든을 지나 뮤지엄 본관으로 향하는 초입부에 만나게 되는 자작나무 숲.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이 자작나무 숲에 마음을 빼앗겨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걸었다.
제임스 터렐관

 제임스 터렐관은 총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홈페이지는 5개라고 안내하고 있다.)  


 ‘“빛”이라는 매체를 작업의 주연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타 작가들과는 다른 예술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하늘과 빛을 관조하는 가운데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누리게 하며,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영적인 빛을 마주하는 ’ 빛으로의 여정‘을 경험하게 됩니다.’(팸플릿에서)  

 (아래 사진은 뮤지엄 산의 홈페이지 이미지입니다. 전시 관람 중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있어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팸플릿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막연하게 빔 프로젝터와 같은 기기를 활용해서 전시 공간에 자연을 재현하는 작업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공간은 주변 환경과 조응하는 공간이었다. 가장 처음 만나는 작품인 스카이 스페이스는 제목 그대로 타원형의 공간에 하늘로 뚫린 공간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 공간에서는 하늘로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지나간다.

 '아, 비가 오면 빗방울이 떨어지겠구나. 비 오면 전시공간이 젖을 텐데, 혹시 천정에 뚜껑이 있어서 비 오면 뚜껑을 닫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천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말라 바스러져가는 초겨울 낙엽 한 장이 하늘 어딘가로부터 날아들었다. 낙엽은 포물선을 그리며 느리게 내려와 내 머리를 스치고 등 뒤로 떨어졌다.


 작가는 빛만으로 현실로부터 유리된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는데, 작품을 보면서 2년 전 아이들과 했던 라이트아트 수업이 문득 생각났다. 작은 손전등으로 빛의 삼원색을 이용해서 빛을 섞어도 보고, 미술실을 색광으로 가득 채우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손전등을 움직이기도 하는 수업이었다. 빛으로 만든 공간은 우리에게 물감으로 만나는 색의 세계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터렐의 공간은 아름다운 빛의 세계에 사색과 명상이라는 추상적인 색채를 더했다. 아이들에게 터렐의 공간을 보여주고 싶어 졌다.  

(아이들과 함께 수업했던 빛과 색 수업 사진입니다.)


 큐레이터의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전체 전시를 감상하고 돌아오는데 30여분이 소요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홀로 그 공간에 앉아 누구의 간섭도 없이 혼자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고작 30여분의 시간으로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내면의 영적인 빛’이 그리 쉽게 찾아와 주는 것도 아닐 터. 빛으로 가득 찬 무한 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잃고 나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초월적인 체험. 큐레이터 없이, 시간에 대한 고민 없이 해보고 싶다.  


 산의 공간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뮤지엄 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제임스 터렐관을 먼저 봤기 때문에, 안쪽에서부터 관람하여 입구로 나오는 동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스톤가든의 풍경.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세계적인 작가들의 조각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제임스 터렐관을 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스톤 가든은 뮤지엄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만든 작은 돌로 된 동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뮤지엄 자체가 산 꼭대기에 있는데, 작가는 다시 그 산 꼭대기에 작은 돌산을 만든 것이다.(각 돌산에는 경상도, 충청도 하는 식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낮으막한 돌산은 산책로를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이어지는데, 경주나 공주의 고분군을 연상시킨다. 다만 고분은 풀로 되어있지만 이 동산은 돌로 덮여 있다. 산책로 주변에는 여러 조각가의 작품이 전시되어있으므로 함께 관람하면 좋을 것이다.


 뮤지엄 본관에서 스톤 가든으로 나오자 마자 벤치에 앉아있는 하얀 석고로 된 인물 전신상을 만날 수 있다. 미국 조각가 조지 시걸의 ‘두 벤치 위의 연인’이란 작품이다. 조지 시걸은 석고 붕대를 이용해서 실제 살아있는 인체를 캐스팅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상화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이 작품의 연인들 역시 그렇다. 중년의 남자의 목살은 길고 깊게 주름져있으며 배는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다. 여자 역시 중년의 나이를 속이지 못하고 있다. 늘어지고 빈약한 가슴, 탄력을 잃은 다리는 숨길 수 없다. 두 사람은 두 개의 벤치에 등지고 앉아 서로를 응시하고 있으며, 추레한 자신들의 삶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본관 2층에서 내려다 본 조지 시걸의 작품. 저물어가는 겨울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 더욱 스산한 느낌을 준다. 


 만일 스톤 가든 전체를 조망하고 싶다면 조지 시걸의 작품 앞에 있는 뮤지엄의 출입구를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올라가면 좋을 것이다. 그곳에 스톤 가든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뷰 포인트가 있다. 그리고 이 장소야말로 조지 시걸의 조각 작품이 주는 느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공간이 마음에 들어 청조 갤러리를 돌아본 후 다시 돌아와 한 동안 머물렀었다. 


 뮤지엄 외관은 파주석이라고 하는 주황빛 섞인 석재로 둘러 싸여있고 내부는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있다. 주황빛 섞인 돌이 참 따뜻한 느낌으로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 대체 무슨 돌인가 궁금하여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파주석이란다. 대리석은 아는데 파주석이 대체 뭔가 싶었다. 혹시 파주에서 나는 돌이라 파주석인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돌의 결마다 흙빛이 자연스럽게 섞인 돌로, 광산이 따로 없을 정도의 귀하며 대한민국에서 이 돌로 건축된 집은 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고. 


 뮤지엄 본관은 전시 공간인 청조 갤러리와 종이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작은 공간들로 구성되어있다. 안내 팸플릿을 보며 공간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관람하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천천히 공간을 느끼면서 느리게 걷기로 했다.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 곳에선가 다 만나게 될 터. 한 두 곳쯤 못 보고 지나가면 또 어떤가. 뮤지엄 관람을 무슨 숙제 해치우듯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노출 콘크리트와 곳곳에 설치된 조명으로 이루어진 복도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연출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조 갤러리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복도는 마치 거울 속의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거울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단지 벽 사이의 유리창에서 들어온 은은한 빛 한 줄기 뿐으로,  나는 복도를 올라가다 거울에 비친 공간인줄 알고 돌아섰다.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한 바퀴 돌아 다시 왔을지도 모르겠다.

복도이편에서 저편을 바라보면 두 개의 다른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거울로 마주보고 있는 줄 알았다. 바보.

 높고 긴 복도를 걷다 보면 의외의 공간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일단, 중간중간 만나는 높고 긴 창으로는 강원도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한옥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차경의 또 다른 버전일 것이다. 창 이외에 벽체 아래쪽에는 외부로 향한 열린 공간이 여러 곳 있는데, 이 공간을 통해서도 바깥 풍경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예를 들어 뮤지엄 외부에는 계단으로 된 인공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물살은 햇빛을 받아 노출 콘크리트에 그대로 반영되어 흔들리는 물살을 벽면에 재현하는 것이다. 겨울인지라 물살은 흐르지 않고 잔잔하게 바람을 담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계절에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된다.



 워터가든은 플라워 가든을 지나 뮤지엄 본관 앞의 주홍빛 대형 철골 조형물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시작된 물의 공간은 뮤지엄 본관을 에워싸고 흐르게 된다. 계곡으로 둘러싸인 산 정상에 다시 인공 계곡으로 둘러싼 건축물을 건축한 격이랄까. 물에 비친 겨울 풍경이 잠시 나를 사로잡았다.

 뮤지엄 본관에서는 백남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아래 사진 좌측) 백남준의 작품은 마치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연상시키는 둥근 천정으로 된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백남준의 작품은 시대를 넘어 신화가 되었으니 그의 작품을 신전에 전시하는 것은 일견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한 때 기성세대에 대한 반란이었던 전위예술도 이렇듯 시간이 지나면 체제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상설전시로는 종이 조형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작품들이 있었고, 다만, 내가 작품들을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하므로 사진 몇 장만 남겨왔을 뿐이다.

청조갤러리로 들어가는 복도
 돌아오는 길

   원주 사는 아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 험난했다. 원주로 가는 길에는 세 번의 교통사고를 목격하면서 가는 내내 긴장했는데,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 또한 무난하지 않았다. 여주를 지나면서 고속도로 전광판에 폭설 예비 경보 문자가 떠서 내일 눈이 오나보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고속도로에 제설차가 나타나 소금을 물 뿌리듯 뿌리고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제설차를 뒤따르기라도 하듯 곧이어 엄청난 양의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은 수원, 안산 부근을 지나면서 절정에 달했다. 진청색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발은 차선은 물론 앞이 안 보일 정도여서 무척 겁이 났지만 운전을 멈출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집에 돌아가야 했으니까. 여기서 멈추면 나는 아마도 내일도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눈의 여왕에게 치맛자락이 있다면 이럴까. 매섭게 쏟아지는 눈은 마치 눈의 여왕이 폭넓은 그녀의 치맛폭을 정신없이 흔들어대듯 차창으로 달려들었다. 무서웠으나 그만큼 매혹적인 폭설이었다.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쥐고 벌벌 떨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아,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계속 하고있었으니까. 서서울톨게이트를 지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어라, 매섭던 폭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간간히 흩뿌리는 얌전한 눈발이 도시로 돌아온 나를 맞이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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