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공곶이 수선화를 보고 온 날
3년 만의 방문
삼 년 만의 방문이었다.
처음 방문 후 다시 방문한 것이 삼 년만이라는 것이 아니라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때'로부터 삼 년만의 첫 방문이라는 의미다.
여고시절, 시험이 끝난 날, 단체로 영화를 보던 문화가 있었다. 그때 본 영화 중 닥터 지바고는 오래 기억에 남았던 영화였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오마 샤리프의 짙은 눈썹과 하얀 눈으로 뒤덮인 러시아의 들판, 닥터 지바고와 그의 연인 라라가 지내던 별장의 노란 수선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우연히 TV에서 노란 수선화가 피어있는 바닷가 계곡의 노부부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팔순이 넘은 두 어르신께서 평생을 걸려 개척한 거제도의 작은 바닷가 농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돌로 가득 찬 해안 골짜기의 돌을 골라 다랭이 밭을 만들고, 그곳에 두 뿌리로 시작해서 수선화로 가득 찬 농장을 일구었다는 이야기였다. 경사가 가파른 농장에서 두 어르신은 직접 설치한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농사를 짓고 계셨다. TV 속 농장에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처럼 노란 수선화가 바람에 수줍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저기다. 저기를 꼭 가보고 싶다.'
수선화 꽃 피는 시기와 나의 일정을 맞추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꽃이 필 때면 나에게 일이 생겼고, 내가 한가한 시간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그렇게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 3월 마지막 주, 불현듯 공곶이가 생각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아뿔싸, 이번 주가 절정이었구나.
그래, 피어 있는 마지막 꽃 한 송이라도 남아있다면 보고 오자.
올해 못 가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할 터.
딸아이와의 하이킹 약속도 펑크내고 버스 예약을 서둘렀다.
거제도의 찬 바람을 뚫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꽃피는 춘사월에 갑자기 불어닥친 꽃샘추위였다. 어디는 눈이 왔다네, 어디는 꽃이 피기도 전에 졌다네 하는 황당한 뉴스를 보면서 옷장에 넣어두었던 겨울 옷을 다시 꺼내 입고 길을 나섰다. 함께 출발하기로 동료들은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아침 8시에 만나기로 했다. 하필 '오만 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공곶이를 보러 가는데 꽃샘추위라니.... 터미널 출입구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피해 모여 앉은 우리 세 사람은 미리 준비해 간 샌드위치와 과일로 아침 시장기를 달랬다. 이른 시간임에도 남부터미널 안은 서울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집 근처에도 거제나 통영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터미널이 있었으나 굳이 서울에 있는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수도권에서 공곶이를 가려면 통영시를 거쳐 가거나 거제시로 가야 하는데, 거제에 터미널이 두 곳 있었다. 그중 고현터미널이 공곶이와 좀 더 가까웠던 것. 그리고 고현터미널 가는 버스는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해야 했다. 다행히 15분 간격으로 배차되어 있어서 시간 선택의 폭이 넓었다.
고현터미널에서 공곶이까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게 되면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 같아 거제시 안에서는 랜트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공곶이는 이른 아침에
고현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한 시경. 도착 예정 시간보다 30여분 늦게 도착했다. 다행히 마음씨 착하신 랜트카 사장님은 터미널 앞에서 30여분을 기다려주셨고, 우리는 곧 차를 받아 이동하여 장승포로 이동했다. 랜트카 사장님 안내로는 장승포가 공곶이 가는 길목에 있고, 그 인근에 식당이 많다고 하니 일단 점심을 먹으면서 이후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갑자기 여행을 떠난지라 우리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거제 여행도 다들 처음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내린 결론은, 오늘은 거제시의 다른 곳을 구경하고 공곶이는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가보기로 했다. 뭔가, 어렸을 적 호빵을 먹을 때 빵 가운데에 있는 팥 앙금을 가장 나중에 먹었던 경험 같은 느낌이랄까. 다음날 공곶이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날, 우리의 선택은 매우 탁월했다.
밤, 잠 자기 전, 우리는 인터넷으로 공곶이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길이 몇 KM씩 막힌다는 등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수다가 가득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글 하나가 있었다.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글이었다.
'.... 영상이나 사진으로 보고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 작아 보이는 수선화 밭,
실망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여행을 기획한 사람으로서 걱정이 되었다.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생각보다 작대. 내가 오자고 했는데, 별로면 어째?'
다들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니 마음이 한결 놓인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둘째 날, 장승포 수협 인근의 식당에서 포장해온 미역국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공곶이로 향했다. 바람이 매섭던 어제와 달리 쾌청한 햇살이 따사로웠다. 숙소는 공곶이에서 불과 십여분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씽씽 달려 금방 공곶이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비는 따로 받지 않아서 차를 세우고, 무거운 외투는 차 안에 버려둔 채, 공곶이로 가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한 참 오르고 나니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미세먼지가 멀리 사라졌는지 아침 공기가 제법 상쾌했다.두 어르신의 농원이 관광지가 되었다는 증거로, 공곶이에 대한 관광 안내판이 우리를 맞는다.
할아버지는 진주 문산이 고향. 1957년 1월 살을 에는 어느 날, 하루 종일 완행버스와 배를 갈아타고 밤 늦게 예구마을에 첫 발을 디뎌놓는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할머니와 맞선을 보기 위해. 색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양가의 승낙으로 한 달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오전에 식을 마치고, 오후에 산보를 나간 곳이 지금 할아버지의 보금자리가 돼버린 공곶이. 그러니까 그때로서는 신혼여행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22년 후 1969년 4월 다시 거제도를 찾게 되고, 공곶이에 정착하게 된다.
이렇게 공곶이에서 살게 된 할아버지는 마침 매물로 나온 지금의 공곶이터를 사서 종려나무와 수선화를 심기 시작했다. 지금은 약 3만3천여평의 농사를 짓고 계시다고 한다.
고개를 넘어서자 이내 숲길이 우리를 반긴다. 짧은 동백꽃 군락지가 이어지고, 가파른 계단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이어졌다. 숲길에는 우리 일행은 제외하고 남녀 두 사람이 앞에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계단 양 옆으로 다랭이 밭이 이어졌다. 종려나무와 동백, 수선화가 분명한 키 낮은 화초,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라색 꽃이 피어나는 초본들까지.
함께 길을 걷던 다른 일행 한 분이 이런 말을 걸어왔다.
"외로운 사람이라 이런 곳에 들어와서 이런 일을 한 거야."
내가 대답했다.
"이런 곳에 들어와 일을 하시다가 외로워지신 거겠죠."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그 사람도, 나도 틀렸다. 외진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편견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더구나 외로운 사람이라 이런 곳에 들어와 산다니....
수선화와 몽돌해안
십 여분을 걸어 가파른 계단을 다 내려왔는가 싶더니, 멀리 이국적인 풍경이 우리 눈을 사로잡았다. 노란 수선화 밭과 큰 키의 종려나무가 서 있는 풍경. 전 날의 검색으로 기대의 키를 다소 낮춘 덕분인지, 아름다운 꽃이 마음을 녹여 준 때문인지 우리는 다 함께 탄성을 질렀다. 노란 수선화 밭은 카카오스토리의 글대로 아주 넓지는 않았다. 아마도 다랭이 논의 수선화까지 함께 핀다면 더 아름답겠지. 하지만, 노란 수선화 밭과 종려나무, 검푸른 바다와 작은 섬 내도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만큼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어떤 장소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소 자체가 아름다울 수도 있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고, 그 장소를 통해 만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 때 그 장소는 더욱 아름다워진다.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선화만 생각한다면, 수도권 근처 놀이공원이나 수목원을 찾아보면 어딘들 없겠는가. 인천에서 이 먼 곳 거제도까지 왔을 때는 단지 수선화만 보러 오지는 않았을 터. 수선화에 깃든 노부부의 노고와 삶을 함께 보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사유지 방문을 기꺼이 허락하여 일요일 한 낮을 행복하게 보냈으니 그분들께 감사하고 싶다.
수선화 밭 끝까지 다다르면 바닷가가 나온다. 제법 크고 둥근돌로 가득 찬 몽돌 해변이다. 우리는 이 해안이 마음에 들어 한 참 머물렀다. 이른 아침이라 방문객도 많지 않았고, 햇살도 따뜻한데 포근한 봄바람과 몽돌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거기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이 아니 좋겠는가.
우리 일행은 가지고 간 커피를 따뜻한 물에 타 나눠 마시면서 바다와 하늘과 꽃과 돌을 마음껏 음미하였다.
돌아오는 길, 아직 버스 시간에 여유가 있어 언덕 위에서 보았던 돌고래 전망대까지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이정표에 표시된 시간은 40분. 조금 빠른 걸음으로 전망대에 도착했다. 실제로 돌고래를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바다와 절벽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도로에 차가 가득차 있었고, 주차장은 주차하기 위해 대기하는 승용차들로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관광버스까지 들어오면서 공곶이 아랫마을을 빠져나오는 시간이 꽤 걸렸다. 아침 일찍 들어온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돌아오는 1시경이 되자 수선화 농원 곳곳에 관광객들이 가득 찼다. 한적한 농원의 아름다움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몽돌해변, 신선대, 해금강, 바람의 언덕
학동 흑진주 몽돌해변, 신선대, 해금강, 바람의 언덕. 첫날 우리가 방문한 곳이다. 몽돌해변은 검은색 자갈로 뒤덮인 해변인데, 거제시에 몇 군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학동 흑진주 몽돌해변은 그중 큰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잠시 덜덜 떨면서 해안가를 걷다가 바로 해안이 보이는 찻집으로 옮겨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였다.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물수제비를 뜨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선대는 해금강을 행해 가던 중 풍광이 예뻐 잠시 들른 곳이었다. 바람의 언덕 맞은편 해안 절벽인데, 그곳에서 바라본 해안가 절벽과 마을이 예뻐 보여 한참 동안 머물렀다.
잠깐 구경만 하자고 차를 돌린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은 이름에 걸맞게 광풍이 불고 있었다. 아무래도 꽃샘추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풍차가 있는 언덕에서 사진을 찍고, 그 위 동백나무 군락지에서 떨어진 붉은 동백 꽃밭에서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바다 위 짧은 산책로도 나름 걸을 만했다. 주차장 근처에 삼시세끼 바다 편에서 유명해진 거북손을 팔고 있어서 작은 접시를 구입해서 맛을 봤다. 싱싱한 것이라면 맛있었겠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냉동 거북손 맛은 이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의 소감이었다.
해금강은 바다의 금강산이란 뜻이란다. 해금강 호텔(영업을 안 하고 있었다.)과 그 주변을 산책했다. 아마도 거제의 해금강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 같았다. 해안에서 바라본 해금강은 특별히 아름답다는 느낌은 없었다. 포구 곳곳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먹거리
함께 길 떠난 일행들이 먹을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편이라 맛집으로 소문난 곳을 굳이 찾아다니지 않았고, 그때그때 먹고 싶은 음식 중심으로 눈에 띄는 식당을 이용했다.
1. 첫날, 점심시간. 마땅히 먹을거리를 찾지 못한 우리는, 그래도 유명하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유람선 터미널 근처의 간장게장집에 자리를 잡았다. 출연한 TV 프로그램을 출력한 플래카드를 주렁주렁 달고, 본관에 이어 별관도 운영한다는 큰 간장게장집이었다. 가격은 일인당 14000원. 소박한 밑반찬 몇 가지에 양념 게장과 간장 게장이 각각 한 사발, 밥이 한 사발 나왔다. 커다란 스텐 국그릇에 담긴 밥을 보고 화들짝 놀랐으나, 짭짤한 간장 게장에 어느덧 한 사발의 밥을 다 비운 우리들. 하지만, 결코 저렴하거나 맛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세 사람 모두 다른 이에게 추천하기는 좀 그렇다는 결론을 내리고, 짭짤한 뱃속과 먹기는 많이 먹었으나 뭔가 헛헛한 마음을 가지고 식당을 나섰다.
2. 바람의 언덕 아래쪽 주차장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성게 비빔밥과 도다리 쑥국을 시켰는데, 의외로 맛있었다. 주인 부부도 친절했고, 밑반찬도 소박한 게 깔끔했다. 다만, 장승포에서도 느낀 것인데, 전반적으로 음식 값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장승포의 작은 식당. 아침 식사를 위해 우연히 들른 작은 식당에서 바지락 미역국을 포장해다 먹었는데, 잠녀들이 바닷속에서 직접 캐왔다는 커다란 바지락으로 끓인 미역국이 참 맛있었다. 가격도 착해서 7000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었다.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식사를 마친 한 테이블의 아저씨들이 "내일 올게요." 하면서 나가는 걸 보고, 관광객보다는 동네 주민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밑반찬도 뭐도 없이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주머니가 어느 사이 커다란 달걀말이를 만들어 포장해주셨다. 손맛도 있고 가격도 저렴하고, 인심도 후한 곳이었다. 이곳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