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가 그렇지는 않으나, 문득 그림 한 점이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 영화와 그런 그림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그림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택했음을 밝힙니다. 왜 하필 그 영화에 그 그림이냐고 물어보셔도 대답하기 힘드네요. 어쩌면 나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려진 자극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조심하기는 했지만 글 중간에 스포 있을 수 있습니다. 걱정되는 분들은 패스해주세요.
12월 23일,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본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 다 보고 나니 그날이 바로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개봉한 날이란다.(영화관에서는 12월 9일 개봉했다.) 개봉한 첫날 이런 얘기 정말 미안한데, 크게 흥행할 것 같지는 않다. 대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운이 남아 이야기될 것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영화 취향은 잡식성이라 공포물에 로맨스에 코미디에 SF까지, 특별한 취향이 없는 편이지만 워낙에 어려서부터 SF를 좋아하긴 했다. 이 영화는 뭔가 다이내믹하고 판타스틱하고 파워풀한(?) 영화를 기대한 분이라면 패스하는 것이 좋다. 이 영화에는 나쁜 외계인도, 치열한 전투장면도, 나쁜 지구인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잔잔하게 흘러갈 뿐. (그렇다고 가슴 졸이는 장면이 아주 없다는 뜻은 아니다.)
2049년, 지구의 과학은 발전하여 우주 곳곳에 자유롭게 탐사선이 오가는 수준이 되었다. 영화는 천문학자 오거스틴과 우주 탐사선 에테르의 귀환이란 두 축으로 진행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양자의 깊은 인연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죽어가고 있다. 주인공 오거스틴의 입을 빌자면 '처음엔 실수였던' 어떤 일로 인해(영화에서는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지구에는 생명이 살 수 없게 되었으며, 오염된 대기를 피해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하로 피신 중이다. 이마저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일 뿐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
북극의 바르보 천문 기지. 구조 헬기를 타기 위한 사람들의 줄이 하얀 설원에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희망조차 없는 피난길이다. 그들을 바라보면 서 있는 천문학자 오거스틴(조지 클루니 분). 그는 피난을 거부하고 북극 기지에 남기로 결정한 상태다.
피난민 사이에서 한 여인이 다급하게 아이를 찾아 헤맨다. 그녀는 아이가 다른 헬기에 탔다는 이야기를 듣자 안심하고 다른 일행과 함께 헬기에 탑승한다. 기지에는 이제 오거스틴 한 사람뿐이다.
혈액투석을 하고, 우주를 떠돌다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선이 있는지 통신을 확인하는 것이 오거스틴의 유일한 하루 일정이다. 그가 북극에 남은 이유는 오직 하나. 탐사차 우주로 나간 우주비행사들에게 지구의 상황을 알리고, 죽어가는 지구별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지구에는 희망이 없다. 지구로 돌아온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우주에 있는 우주비행사만이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들을 우주로 돌려보내야 한다.
어느날, 오거스틴은 책상 아래에 숨어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스스로를 아이리스라고 소개한 아이는 조금씩 오거스틴과 가까워지고,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견딘다. 그때, 목성의 위성인 k-23에서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우주선 에테르호가 발견된다. 그 별은 오거스틴 개인의 삶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별로, 젊은 시절의 오거스틴은 이 별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상대로 K-23은 인류가 생존 가능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에테르호에는 셜리(펠리시티 존스 분)를 비롯한 다섯 명의 우주인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며 지구로의 긴 항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의 그 어느 기지에서도 그들의 신호에 응답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 우주선에는 불안감이 감돈다. 우주선을 발견한 오거스틴 역시 교신을 시도하나 기지의 안테나는 너무나 미약하다.
오거스틴은 보다 강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장비가 있는 다른 기지로 이동을 결심하고 소녀와 함께 길을 떠난다. 아이리스와 오거스틴은 기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리고, k-23으로부터 돌아오고 있는 우주선은 지구에 도착할 수 있을까? 둘은 통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미드나이트 스카이에는 삶(혹은 종말)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태도가 나온다. 예를 들어, 천문과학에 일생을 바친 오거스틴. 그는 보통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우주에 대한 열정에 자신을 던졌다. 그 역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을 위해 살았다.
k-23으로부터 돌아오는 우주선의 우주비행사들 또한 결정의 순간에 이르게 된다.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도 지구로 귀환할 것인가, 아니면 미지의 우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인가.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그리워하고 선택을 앞두고 있는 삶은 거대한 것이 아니다. 아주 작고 소소한 일상, 그리고 그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선택이다. 영화는 그 삶의 소중함에 닿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그래서 SF영화임에도 이 영화에는 보통의 SF영화에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사건보다 각자 살아온 삶의 가치에 따라 미래를 선택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나갈 뿐이다. 지구로의 귀환이든 우주로 회귀든, 어느 쪽도 어느 누구도 맞서 보지 못한 세계가 될 것이다.
앙드레 드랭(1880-1954) 남자의 초상과 창문앞의 오거스틴. 우울하고 무기력해보이는 그림속 남자와 달리 오거스틴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오거스틴 또한 생의 여러 순간에 무엇인가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의 연인은 오거스틴에게 '미지의 무언가를 탐험하느라 당신은 삶은 저물어가고 있다'라고 호소한다. 살아있는 삶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과 사람의 온기 있는 삶-사랑, 가족 등-을 선택하지 않은 오거스틴의 초상을 누군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앙드레 드랭의 그림처럼 회색조의 느낌으로 완성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그의 삶이 의미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주어지지만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고 각자의 선택이니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오거스틴은 스스로는 선택하지 않았으나 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무언가와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