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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Mar 27. 2021

미얀마를 생각하다

첫 코로나 소식을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14개월 전, 미얀마 여행의 마지막 도시였던 바간에서였다.

"중국이 전염병 때문에 난리라는데."

숙소에 들어와 인터넷 검색을 하다 후배 k에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사스 때도 신종플루 때도 한 계절이면 그럭저럭 극복되었던 전염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이렇게 오랜 기간 우리의 삶을 저당 잡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뉴스를 보니 마스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인터넷을 뒤져 D제약회사의 KF94 마스크 60개들이 한 박스를 주문했다. 이것을 다 쓰기 전에는 끝나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하면서.


짬짬이 미얀마 여행 사진을 폴더별로 정리하고 브런치에 여행 후기를 쓰기 시작했다. 여행의 생생함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하고 싶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동남아시아 여행이 처음이었던지라 여행을 다녀온 후 나름 생각이 많았다. 한때 군부독재로 힘들었던 국가였지만 현재는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나 미얀마의 정치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가기 전에 읽었던 미얀마의 미술책들과 여행에서 본 것들을 연관 지어 글을 써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만달레이와 바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해놓고 싶었다. 미얀마의 소수민족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쓰고 싶었다. 우리에게 스카프를 팔았던 인레 사원의 수줍은 소녀에 대해서도 쓰고 싶었다.


택배 상자가 집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 갑자기 마스크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코로나 환자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세계는 셧다운 상태에 들어갔다. 누구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 년을 지나면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목숨을 담보한 모험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세상에서 여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더욱 고단해져 가는 코로나 상황의 삶에 일상은 마비되었고, 아무리 지나간 시간일지라도 여행후기를 쓴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사치스럽고 죄스럽게 여겨졌다. 여행을 다녀오고 벌써 일 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미얀마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생생한데, 이제 미얀마는 코로나와 상관없이 당분간은 갈 수 없는 곳이 된 것 같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서 늘 느꼈던 것이지만 권력에의 욕구는 염치도, 인격도, 명예도 다 소용없게 만드는가 보다. 권력은 금권을 장식처럼 붙이고 다니니 권력을 가지면 다 가질 수 있는 것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는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에는, 믿기지 않겠지만, 교련 수업이 있었다. 남학생들은 총기 다루는 법을 배웠고 여학생들은 전쟁을 대비해서 간호 처치를 배웠다. 물론 지금처럼 안전교육 차원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예비 군인, 간호사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인근 군부대에서 각 학교의 훈련 상황을 점검하러 나왔다. 우리는 흰 교복 블라우스와 흰 체육복 바지를 입고 북한군 열병식에 나오는 군인들처럼 열과 오를 맞춰서 운동장을 열병했다. 나와 친구 네명은 키가 크고 날씬했던(?) 죄로, 연대 참모란 이름뿐인 계급을 받았다. 전교 학생회장 바로 뒤, 전교생 맨 앞에서 완장을 차고 행진곡에 맞춰 걸어야 했다. 네 명은 이 하루의 행사를 위해서 매일 점심시간마다 만나서 제식훈련을 했다. 학생회장은 연대장이 되었다. 연대 차렷! 대대 우로 봣! 같은 구령을 붙였고, 우리는 각진 포즈로 오른손 끝을 관자놀이에 붙이면서 '충성!'을 외쳤다. 전교생의 구령이 하나처럼 들리지 않으면 몇 번이고 반복했다. 담임선생님은 행사가 끝난 후 촬영한 사진을 기념으로 주셨는데, 그 사진은 아직도 내 앨범에 꽂혀있다. 그 시대는 그랬다. 학교는 전시 체제의 일부였고, 교련 수업이 있었고 하얀 칼라의 순수한 여고생인 우리는 전시 예비 간호사였다.


대학에 입학해서 연극반에 가입했다. 선배들이 축제 공연을 위해 그리스 비극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연습하고 있었다. 나는 의상을 맡아 무대 옷을 만들었다. 그리스 시대의 옷은 재단하지 않고 한 장의 천으로 만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매일 열 시까지 남아서 선배들의 연습을 구경했다. 쌀쌀한 봄 밤, 습기 찬 강당 무대에서는 외삼촌인 크레온 왕이 오빠를 매장하지 못하게 한 데 분개한 안티고네가 '인간의 법은 하늘의 법을 막지 못한다.'라고 외치며, 죽음으로 크레온 왕에게 항거하고 있었다.


연출을 맡은 선배가 갑자기 연습 중단을 선언했다. '다 실로 들어와.'(그때는 동아리실을 반실이라고 불렀다.) 영문을 모른 채 우리는 강당 무대를 내려와 동아리실로 집합했다. 어둠침침한 강당 한 구석에 앉아있던 낯선 남자 둘이 일어서서 강당 밖으로 나갔다. 두 남자는 사복경찰이었다. 까짓 대학생들 연극 공연이 뭐가 무서워서 그곳에까지 와서 사찰을 하고 있었을까. 안티고네가 정권에 대한 반항 의식을 불러올까 봐 그걸 감시하고 있었을까? 공연 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곳에선가 의문사한 청년들의 기사가 자주 신문에 실리던 시절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책 한 권에 경찰서로 연행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아무렇게나 얻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자유는 이렇듯 우리 삶 곳곳, 아주 작은 것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지금 우리의 자유가 있다. 아, 하지만 그런 희생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조차 그분들께 미안한 마음이다. 그때 그시절 나는 비겁했다.)


최근 뉴스에 나오는 미얀마 이곳저곳의 처절한 싸움의 현장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군부에 항거하고 죽어가고 있다. 조만간 내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저들도 우리처럼 군부의 어두운 역사를 관통하기 위해 기나긴 싸움을 해야 하는 걸까. 피 흘리는 국민 옆에서 샴페인을 터트리며 관광사업 홍보를 하는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우리 역시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 오랜 시간 그런 일을 당했으므로 그들이 당하고 있는 일이 낯설지 않다.

뉴스를 보면서 여행 갔던 일 년 전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숙소 앞에서 택시를 세워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그들, 매캐한 냄새를 도시에 가득 채우고 바지런하게 돌아다니던 오토바이들. 야채를 맛나게 먹던 우리를 위해 말없이 한 주먹 야채를 접시에 떨궈놓고 가던 가게 아주머니, 만달레이의 슈퍼마켓, 양곤의 가게들, 바간의 탑과 전기오토바이....

나는 못다 쓴 미얀마 여행 이야기를 다시 한번 쓰고 싶다. 만달레이 왕궁 앞에서 만났던 청년, 전주에서 유학하고 있고 졸업하면 돌아와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고 싶다했었지. 그리고 바간의 탑들과 오토바이, 일출, 숙소에서 비행기 티켓을 대신 사줬던 호텔 로비의 미얀마 소녀.... 그들을 다시 보고 싶다.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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