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은 도처에 있고, 색은 누구나 누린다. 아무 곳에 아무렇게나 있는 색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감동하는 데는 아무런 돈이 들지 않는다. 색은 아마도 인류가 지구에 살기 시작한 이래 우리 곁에 계속 있었다. 마치 공기가 우리 곁에 있듯이.
그런데, 색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색은 우리가 보는 저 물체들 속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눈이 색으로 보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우리는 색으로 느끼는 것일까?
처음 이런 궁금증이 생긴 것은 학생들과 빛과 색 단원 수업을 할 때였다. 왜 그런 궁금증이 생겼는가를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색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야 한다. 당시 학생들과 함께 수업할 때 사용했던 PPT자료를 소환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빛과 색 수업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 참고. https://brunch.co.kr/@gipyung/60)
어느 가을 오후, 나는 집 앞 과일가게에 들렀다. 무엇을 살까. 사과, 수박, 복숭아... 다 맛있어 보인다. 망설이던 내 눈에 사과가 들어왔다. 부지런한 가게 주인아저씨가 목장갑으로 잘 닦아놓은 사과가 반짝반짝 유난히 맛있게 보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사과를 가리키며 주인아저씨에게 이야기한다. "사과 만원 어치만 주세요."
과일 가게에 들어간 내가 사과를 보고 구입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과학 지식이 매우 부족하긴 하지만, 조금 과학스럽게 이야기해 보겠다.
내가 사과를 보고 색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빛이 있어야 한다.(그 빛 안에는 '가시광선'이 포함되어 있다.) 빛이 사과에 가 닿으면 사과는 빨간색 파장만을 반사하고 나머지 모든 색의 파장은 흡수한다. 사과에서 반사된 빨간색은 우리 눈으로 들어와 시신경을 자극한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리 눈은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를 가지고 있다.(아마 중학교 과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대충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 이 중 간상세포는 명암을, 원추세포는 색깔을 구별한다. 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밤이나 지하실에서는 간상세포가 맹활약을 한다. 왜냐하면 원추세포는 일정 강도 이상의 빛에서만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밤에 색이 보이지 않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어두워지면 주변 물체의 색이 모두 무채색이 되지만 그 누구도 색이 사라진 세상을 궁금해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는 아침이 오면 여전히 색이 그곳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감지하는 색의 대부분을 밝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원추세포의 이런 특징 때문이다. 화려한 컬러 영상의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고, 벚꽃의 화려한 분홍과 가을 단풍을 감상하고 감탄할 수 있는 것 또한 모두 원추세포 덕분이다.
원추세포에는 다시 세 종류가 있다. 빨간색을 감지하는 원추세포, 녹색을 감지하는 원추세포, 파랑을 감지하는 원추세포. 철저한 분업 시스템이다. 미술시간에 왜 빛의 삼원색을 R GB(Red, Green, Blue)라고 가리키는지는 원추세포의 특성을 알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세 가지 종류밖에 없는 원추세포지만,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색의 수는 놀랍게도 30만개에 이른다고 한다. 반면, 우리가 구사하는 색 이름의 수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으니 언어의 바운더리에 감각을 넣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학자에 따라서 단 세 가지 색만 구분할 수 있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다!) 정말 어메이징 하고 미러클 하고 서프라이즈 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빨간색 사과에서 반사된 빨간색 빛은 빨간색 원추세포가 감지한다. 원추세포의 감각은 우리 뇌로 전달된다.(인간의 감각 중 시각이 약 70%를 차지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고 색을 느끼는지 우리 과학은 아직도 정확한 메커니즘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또한 어메이징 하고 미러클 하고 서프라이즈 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감각을 전달받은 뇌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해명하려고 애를 쓴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결론을 내린다.
"오오, 빨간색 사과네.(객관적인 정보 확인) 진짜 맛있겠다.(경험에서 나오는 분석.)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과를 좋아하셨는데,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나네. 훌쩍. (정서적 반응)"
이제 이야기해보자. 색은 어느 부분부터 있었던 것일까? 빨간 사과가 반사한 파장을 인식한 것이니 색은 사과 속에 이미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어떤 물체는 빨강을, 어떤 물체는 파랑을 반사하는 걸까? 물체의 물리적 속성 때문에 색이 생기는 것일까?
인간의 눈은 불안정하여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색을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원추 세포 중 하나가 불완전하면 빨강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적록색맹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지구의 모든 생물이 다 인간과 똑같은 색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인간의 원추세포는 세 가지지만 새는 네 가지 원추세포를 가지고 있단다. 인간은 가시광선 영역만 볼 수 있는 반면 어떤 동물들은 적외선이나 자외선 영역을 볼 수 있단다. 생물의 시각 구조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지는데, 색이 물체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면 색은 우리 눈 속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감각한다. 또 같은 색이라도 주변의 상황에 따라 다른 색으로 감각한다. 동일한 물체도 밝기나 주변 색에 따라 다르게 다른 색으로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까, 색에 대한 지각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우리 뇌라는 이야기다. 색감각을 인지한 뇌가 빨갛다고 판단을 내렸으니 우리 머릿속 뇌세포 안에 색이 있는 것일까? 심지어 우리는 실제로 없는 색을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잔상이나 착시가 그렇다. (이 부분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해보겠다.) 아니면, 애초에 빛 때문에 색이 생기는 거라면, 색은 빛 안에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봐야 할까?
색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온 컬러>(데이비드 스콧 카스탄&스티븐 파딩 저)라는 책에서는 내가 가졌던 의문을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화학자들은 색을 띤 물체의 미시물리학적 속성에서 색을 찾으려 한다. 물리학자는 이 물체가 반사하는 전자기에너지의 특정 주파수에서 색을 찾는다. 생리학자는 이 에너지를 감지하는 눈의 광수용체에 색이 있다고 한다. 신경생물학자는 이렇게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서 처리한 것이 색이라고 한다. 물론 각자의 탐구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생각이 서로 엇갈리는 것을 보면 색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혹은 현상과 심리의 불분명한 경계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이미지 출처:한국 자수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