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옛 전설이나 이야기를 주제로 일주일에 한 번 방영되었던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매주 주제가 달랐는데, 여름마다 의례히 등골 오싹한 괴담이 등장했다. 구미호가 나오는 여우골 이야기부터 저승사자를 물리치고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귀신의 한을 풀어준 사또 이야기 등.... 전설의 고향은 꽤 오랜 시간 장수하며 사랑받았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김호석 <전설의 고향> 전설 속 억울하게 죽은 여인들의 이야기는 어찌 그리 많은지. 저마다의 한을 품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여인들은 누군가의 꿈속에 나타나 자신들의 원을 토로한다. 보통 삼단 같은 머리를 허리까지 풀어헤친 창백한 얼굴에 하얀 소복이 그녀들의 클리셰. 조명은 보통 아래에서 비추고, 그녀들의 얼굴이 갑자기 TV 화면에 가득 차면 우리 형제들은 비명을 꿀꺽 삼키며 베개를 끌어안곤 했다.
소복. 소복은 비단 한 맺힌 여인의 복색이었을 뿐 아니라 상을 당했을 때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상복의 색이기도 하다. 유족들 중 맏상제는 의례히 삼베옷을 입었고 나머지 유족들은 흰색 베옷을 입었다. 우리 전통에서 흰색은 이렇듯 죽음과 관련된 색이었다.
조선시대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상복과 관련하여 '가정을축년(명종 즈음을 말함) 이후 여러 번의 국상을 당하여 계속해서 흰 옷을 입는 것이 드디어 풍속을 이루어....'라는 기록을 남겼고 영조실록에도 '명종 말년에 연달아 국상을 달하여 흰 옷 입는 것이 습관 되어....'라는 기록이 있다. 또, 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년)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도 있다.*1
'부모가 생존한 자는 흰 빛으로 선 두르지 않고, 부모를 잃은 자가 집안을 담당하게 되면 채색으로 선 두르지 않으며'
부모가 생존해있음에도 불구하고 흰 빛으로 선을 두르거나 부모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채색으로 선을 두르면 안 된다는 것은 고종이 즉위한 해까지만 해도 복식과 관련한 전통 예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흰색은 상을 나타내는 상징색이었다.
다음은 1919년 고종황제 인산 날(장례식 날) 모습이다. 상여를 맨 사람들은 물론 시민들의 모습도 모두 흰 옷을 입고 있다. 흰 갓을 쓴 사람들도 보인다. 역시 상복으로 흰색 옷을 입고 있다.
이미지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isdnnet&logNo=22133050311 이렇게 전통적으로 죽음과 관련된 색은 흰색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검정색이 장례예식의 예복색으로 흰색을 대체하고 있다. 지금은 장례식장에 문상을 갈 때 흰색 옷을 입는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유족들이 입는 옷인 상복 또한 예전에는 삼베옷이나 소복을 입었지만 지금은 모두 남자는 검정색 양복, 여자는 검정색 개량 한복 디자인의 옷을 입는다. 상주건 유족이건 문상객이건, 모두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이 장례 문화의 기본 예법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다가 검은색 상복이 소복을 대체하게 되었을까?
어느 날 우연히 다음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몇 년 전 한 기업체 회장의 장례식에 고인의 유족들이 흰 상복을 입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최근 주변의 장례 예복이 다 검은색인지라 아마도 흰 상복이 눈에 띄었던가보다. 이 기사에서 상례(喪禮) 전문가인 정종수 전 국립 고궁박물관장은 “근래 굳어진 검은 상복은 일제 잔재”라며 “원래 조선 시대 상복은 삼베옷이 주를 이뤘는데 193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의례 준칙’을 기점으로 상복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정 전 관장은 “30~40년 전 상조 회사가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일본식 상복 문화가 더 퍼졌다”“상주가 검정 양복을 입고, 완장을 차고 가슴에 리본을 다는 것은 일제 강요로 만들어진 일본식 문화다. 한술 더 떠 완장에 줄까지 넣어 줄 수에 따라 상주, 사위, 손자를 구별하기까지 한다. 일제 잔재도 모자라 국적 불명 문화를 덧댄 격”이라고 했다. (주2)
상례전문가인 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의 이 인터뷰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전통적인 상복인 흰색 대신 검은색을 들여왔고, 이를 박정희 시대 가정의례준칙이 확고히 했으며, 최근 일본에서 들어온 상조회사에 의해 검은색 상복이 소복을 빠르게 대체했다는 이야기다.
전통 장례 문화에서 장례가 끝나면 상복은 모두 불태운다. 상조회사는 상복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것이니 옷의 보존, 오염이나 세탁의 편리성 측면에서 흰색과 검은색을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장례문화가 예전과 다르게 개인이 아닌 장례업체가 주관하는 시대가 되어 장례업체의 편의성에 의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색과 관련한 우리 전통문화 하나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일본에서 들어온 상조회사이니 당연히 일본의 전통 상복 색을 도입했을 것이라 그 또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주 1 위의 역사서 기록은 <전통색, 오행과 오방을 내려놓다> P108, P234-235, 금동원, 연두와 파랑(2012)
*주 2 조선일보 기사 삼성가 여인들은 왜 흰 상복을 입었을까(2020.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