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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Oct 17. 2021

나는 오징어 게임이 불편하다.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전체 시청률 1위라고 각종 매체에서 시끄럽다.

할리우드 시리즈 영화 한 편 가격에 전체 회차를 다 만들어서 가격 대비 엄청난 가성비를 자랑한다는 둥 등장 배우들이 미쿡 TV에 출연해서 인터부를 했다는 둥 K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는 둥 오징어 게임 덕분에 넷플릭스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는 둥, 더 이상 어떤 표현도 불가능할 정도의 화제를 몰고 다니는 것 같다. 오징어 게임은 영화를 넘어 전세계적인 어떤 현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도 지난 추석 연휴 때 몰아서 다 봤다. (내 돈 내 시청)

내가 본 최고의 잔인한 영화는 <나는 악마를 보았다>였다. 오징어 게임은 이를 능가하는 극강의 잔인함을 자랑하는 살인게임. 웹툰으로 돈을 놓고 죽음의 경쟁을 벌이는 가상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여러 매체로 익히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오징어 게임>이 보여주는 세계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나는 매스컴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오징어 게임에 대한 찬사가 매우 불편하다. 내가 오징어 게임 비슷한 류의 살인게임을 다룬 콘텐츠를 잘 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의외로 추리물과 고어물을 잘 보고 즐겨 보는 편이다. 나도 심장 쫄깃한 장면들을 손에 땀을 쥐고 보는 긴장감을 의외로 즐긴다. 실은 오징어 게임도 한꺼번에 몰아서 하룻저녁에 다 봤다. 그런데, 잘 봐놓고 왜 나는 오징어 게임이 불편할까? 거의 국뽕에 가까운 모든 찬사들을 뒤로하고 나 홀로 왜 불편한 것일까?


나는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모든 게임을 다 해보고 자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줄다리기, 딱지치기, 뽑기(영화에서 달고나라고 부르지만 실은 달고나는 허연 누가 캐러멜을 녹여 만든 과자로, 뽑기가 맞다.). 학원이 없던 시절에 성장한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동네 아이들과 골목골목에서 놀이를 즐겼다. 놀이를 하다보면 싸움이 일어나 편 갈라서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다투기도 했다. 그러다 지면 분해서 울기도 하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웃기도 했다. 해가 지고 뉘엿뉘엿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새어 나오고, 엄마들이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는 꼬질꼬질 해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일도 같이 놀자고 외치곤 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이유는 나는 모른다. 그럴만한 능력도 안목도 없다. 하지만 해외 유수의 대학생들이 갑자기 울려 퍼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소리를 듣고 얼음이 되었다거나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총 쏘는 시늉을 하거나 엎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비로소 나는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10년 전부터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사실인지 뻥인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콘텐츠가 나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숙고의 과정과 시나리오의 탈고 과정을 거쳤어야 하기 때문에 아마 사실일 거다. 시대가 무르익지 않아서 다들 고개를 젓던 이 작품을 넷플릭스가 받아서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무르익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영화보다 더 잔혹한 세상이 되어서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나는 그의 시나리오가 영원히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동혁 감독의 가장 큰 잘못은 살인 게임이라는 잔인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고유하게 즐기고 온전히 보존해야만 할 놀이의 세계를 완벽하게 파괴했다는 데 있다.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세상에서 놀이는 사회성을 배우고 배려와 정당한 규칙을 익히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한다. 놀이는 아이들이 또래 속에서 상상하는 힘을 길러주는 마법의 세계다. 황동혁 감독은 상상의 세계에 있어야 할 놀이를 현실의 참혹한 현장으로 끌어내렸다.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에게 놀이의 세계는 없다. 놀이는 황동혁 감독의 잔인한 머니게임의 배경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어린 시절 순천에서 성장했다. 본가는 남도 끝자락 고흥군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방학이면 고흥의 할머니 댁을 꼭 방문하곤 했다. 그 동네에는 당연히 내 또래 아이들이 많이 있었고 나와 그 아이들은 자주 어울려 게임을 하곤 했다. 게임 가운데는 서로 다 알고 있는 것도 있었고 순천에서 살고 있는 나만 알고 있는 게임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게임을 전수했고, 한 두 해가 지나자 우리 동네에서 부르던 이름과 다른 이름으로 그 게임을 부르며 노는 고향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일종의 놀이문화 전파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징어 게임을 타고 한국 어린이들의 놀이문화도 해외로 전파되고 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으로 전파된 그것은 어린이의 놀이도 뭣도 아닌 잔인한 살인 게임 놀이다. 해외의 많은 오징어 게임 시청자들에게 그 게임은 어린 내가 놀았던 즐거운 게임이 아니라 잔혹한 어른의 게임이다. 최소한 오징어 게임 시청자들에게 이제 한국의 어린이 문화는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놀이를 하는 그들은 영화 속 한 장면에 자신들을 세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한국 어린이 놀이문화 이야기를 들으면 오징어 게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한국 어린이들의 놀이문화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세계가 아니라 폭력으로 오염된 전파 불가능한 문화가 되었다.(오징어 게임에서 다룬 놀이만 한정해도 분명한 사실이다.)


오징어 게임과 함께 내 추억 속 놀이 또한 사라졌다. 황동혁 감독은 어린이의 놀이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어른이 된 나의 추억도 파괴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이를 즐기면서 싸우고 화해하고 성장했던 마음 가득한 따뜻한 추억 하나가 사라졌다. 나는 나만 그러기를 바란다. 다른 모든 이들은 영화는 영화로,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로 분리해서 사고할 줄 아는 쿨내 나는 어른이길 바란다, 제발. 어린이의 놀이를 머니게임에 소환하고 잔혹한 게임의 배경을 동화처럼 그린 역설이 오징어 게임의 가장 뛰어난 측면 중 하나라는 호사가들의 평가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추억 하나를 빼앗긴 예민하고 찌질한 어른인 나는 황동혁 감독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나는 오징어 게임이 너무나도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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