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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Mar 01. 2018

<영화> 쉐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

*스포 있어요.


 뒹굴거리기조차 지겨워진 어느 오후. 영화나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막상 극장 매표소 앞에 섰는데 특별히 끌리는 영화가 별로 없다.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흐린 날씨 때문일까. 스릴러나 코미디는 그다지 끌리지 않아서 선택한 영화가 <쉐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였다. 영화를 선택하면서도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 13개 부문에 올랐다는 것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제법 유명하다는 것도 몰랐다. 정보다운 정보는 하나도 없이 상영관에 들어섰으나 결과적으로는 아무 정보도 없었던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선입견 없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줄거리

 영화는 60년대 냉전시대, 우주 개발이 한창이던 때 미 항공우주국이 배경이다. 여주인공인 엘라이자는 청소노동자이며 말을 못 하는 장애를 가졌다. 그녀의 친구 젤다는 그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녀의 수화를 세상으로 연결해주는 유일한 친구, 이웃인 자일즈는 시대에 한 발씩 늦게 반응하는 화가다. 

 어느 날, 연구소에 아마존에서 발견된 괴생명체가 들어온다. 괴생명체는 단백질만 먹고, 물과 공기 호흡을 하지만 오래 물 밖에서는 견디지 못한다. 연구 책임자인 스트릭랜드는 그를 폭력으로 제압하려다 두 손가락을 잃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해부하고자 한다. 괴생명체를 '발견'한 엘라이자는 그를 연구소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자신에서 벗어나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쉐이프 오브 워터(홈페이지)
1. 아름다운 물의 이야기

 주인공 엘라이자의 가장 친한 친구인 화가 자일즈의 구술로 시작되는 이 영화의 첫 화면은 마치 물속의 방을 묘사하듯 부유하는 엘라이자의 방으로부터 시작한다. 물 위로부터 물아래로 내려와 현실 속의 소파에서 잠든 엘라이자의 첫 화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엘라이자는 인어공주에 비교된다. 그녀는 고아이고, 누군가 성대를 없앤 흔적인 선명한 세 개의 목의 상처를 가졌으며,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물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색채는 초록색이다. 깊은 물속을 연상시키는 초록색은 첫 화면부터 마지막 화면까지 영화 전반에 걸쳐 깊은 인상을 준다. 물은 영화 곳곳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엘라이자의 목욕씬에서의 물이 그녀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중반부를 넘어서면 물 속은 사랑의 공간으로 바뀐다. 물은 그녀의 목욕탕을 가득 채우고 그녀의 집 아래에 있는 극장으로 넘쳐흐른다.

 사랑에 빠진 엘라이자가 비 오는 날 버스 차창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섬세하게 만지고 빗방울이 차창으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도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버스로 출퇴근하는 엘라이자가 차창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매만진다. 물방울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하듯 그녀의 손 끝에서 춤을 추며 유영한다. 물방울만으로도 말 못 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섬세하게 만질 줄 아는 감독의 능력이 참으로 놀라웠다. 

쉐이프 오브 워터(홈페이지)
2. 비주류들의 이야기

 이 영화의 큰 줄기는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미국 주류사회와 흑인, 장애인, 성소수자로 대표되는 비주류 간의 갈등으로 나뉘어 있다. 주인공은 말을 못 하는 농아이자 청소부로 일하는 하층 노동자로, 가족이 없는 고아이다. 그녀는 성대를 잃은 채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주인공의 가장 절친한 이웃은 실업자 상태의 화가로, 게이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자신이 좋아하는 파이 가게 주인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는 주류사회를 동경하고 쫓겨난 직장으로의 복직을 통해 주류 사회의 일원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녀의 절친이자 직장동료인 데릴라는 흑인이다. 그녀의 남편은 무능하고 권위적이나 백인의 권력에 쉽사리 굴복한다. 연구원인 호프스테틀러는 러시아인으로 외국인이다. 그는 조국에 이용당하는 편이다. 그가 조국의 조직원과 접촉하는 장면은 매우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반면, 주류사회를 대표하는 스트릭랜드는 연구소를 지배하는 폭압적인 전제군주로 묘사된다. 마치 60년대 미국 영화 포스터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생긴 그의 부인은 금발의 미녀다. 그는 고급 승용차와 안락한 집, 두 아이를 둔, 가족에게서 존경받는 아버지다. 미국 중산층 가정을 상징하는 그는 가정에서와 달리 직장에서는 전기 충격봉을 죄의식 없이 사용하고, 청소부들의 수다에도 복수하는 등 매우 폭력적이고 편협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입장에서 주인공 엘라이지와 친구들은 뭔가 결핍된 존재들이다. 그녀들은 스트릴랜드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고 모독당한다. 

쉐이프 오브 워터(홈페이지)


3. 침묵을 다루는 섬세함

 주인공 엘라이자는 말을 못 한다. 배우의 연기는 너무나 섬세해서 대사가 없는데도 풍부한 표정과 몸짓으로 이를 커버해간다. 그녀의 마음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음악과 그녀의 이웃인 화가 자일즈의 티브이이다. 자일즈는 티브이를 보는 것이 취미인데, 두 사람의 만남에는 늘 티브이의 소리가 끼어든다. 티브이는 어떤 때는 무성영화의 한 장면이었다가 뮤지컬을 방영하기도 하고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한다. 그런데, 티브이의 대사와 상황은 말 못 하는 그녀의 상황과 심리와 미묘하게 오버랩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티브이 소음조차도 주인공의 심리묘사에 사용한 감독의 능력은 정말 뛰어나다. 그녀는 딱 한 번 자신의 사랑을 목소리로 표현하는데, 뮤지컬처럼 아름답게 묘사된 이 장면이 나는 오히려 불편했다. 영화 내내 보여준 그녀의 침묵이 너무나 완벽하여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4. 낯선 존재와의 사랑

 주인공 엘라이자는 처음으로 괴생명체가 음악에 반응하고 달걀을 좋아하며 그녀의 수화를 이해하고 따라 할 줄 아는 지적인 존재임을 알아차린다. 사랑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타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가 내 삶에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사랑이 싹튼다. 사랑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이 아는 존재가 아니라 나만이 알 수 있는 특별함을 가진 존재로 변화한다. 

  괴생명체에게 엘라이자의 장애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그 또한 그녀를 알아차린다. 그녀가 자신을 인간과 다른 종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봐주는 유일한 인간임을. 그리고, 그는 인간이 아니기에 그녀의 장애를 통해서 그녀를 판단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의 생명이 위급함을 알아챈 엘라이자는 자신 주변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를 연구소로부터 빼내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사랑이 그녀를 소심한 청소부로부터 모험의 주인공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영화의 일부는 보기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스스로를 우주로부터 격리하여 특별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괴생명체와 인간과의 사랑을 어떤 이는 아름답다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기괴하다 할 것이다. 나 자신도 사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조금은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설득력 있다면, 그것은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스트릭랜드를 맡은 배우의 열연과 괴물이 주는 매력에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괴생명체와 엘라이자와의 사랑은 신화나 전설처럼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로 끝난다. 아마도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쉐이프 오브 워터(홈페이지)
5. 사랑의 형태

 '사랑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물과 같이 형체가 없으면서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 물은 어떤 그릇에도 담기듯이 사랑은 그릇의 다름을 결함으로 여기지 않고 그릇 자체로 여길 수 있는 힘이 있다. 말을 할 수 없어도, 외형이 달라도, 피부색과 국적, 성적 정체성이 달라도.' 

따위의 교훈을 굳이 찾을 수 있어야만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일까?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모든 사람이 영화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 영상과 음악과 배우들의 미묘한 표정으로부터 전해지는 울림과 같이 영화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느낀다. 영화관에 걸리는 영화는 많지만 이 영화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를 가진 영화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만일 영화를 본 후 사랑의 형태에 대한 깊은 깨우침이 있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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