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문학동네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첫 챕터를 읽고 나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책을 읽으면서 책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러시아의 조국 전쟁,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여군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초로 쓰인 이 책은 이념의 시대에 오로지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행간, 자간은 그 여성들의 고통,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통에 대해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고통을 만나면 그 고통을 직면하기보다 외면하고 싶어 진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비에트 군대에 약 백만 명의 여성들이 참여해서 싸웠다고 한다. 당시 소비에트 연합은 스탈린이 통치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즉 조국 전쟁에 참전할 당시 소비에트 군대는 곧 모든 전선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스탈린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남자들의 공간이다. 아니, 공간이었다. 여자들이 전쟁에 참전한 것은 역사에서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나 여자들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라고 한다. 전쟁과 관련된 용어는 대부분 남자들의 것이었다.
러시아어는 모든 명사가 남성 명사, 여성명사, 중성 명사, 이렇게 세 가지 성으로 나뉜다. 군인을 가리키는 말들은 거의 남성 명사로, 남성을 지칭한다.-옮긴이 주
당시 소비에트 연합의 여자들은 사회주의 조국 러시아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16세, 혹은 그보다 훨씬 어린 14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원하여 전선으로 달려갔다. 소련은 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 조국 전쟁에 참전했던 그녀들의 자리는 없었다. 그녀들의 전쟁은 잊혔다! 그녀들 또한 잊혔다. 전쟁은 남자들의 공간이고 군인은 남자들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의 참전은 기억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기록되면 또한 안 되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자신의 훈장을 자랑하며 전쟁의 무용담을 늘어놓았을 때 그녀들은 자신의 참전 사실 자체를 조용히 숨겼다. 남자들 전쟁의 상처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상받을 때 그녀들의 상처는 자랑이 아닌 숨겨야 할 결함으로 여겼다. 심지어 훈장과 갖은 표창장을 없애버린 여자들 조차도 있었다. 전쟁 중 그녀들의 참전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미화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국가권력은 그녀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상상을 한 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길을 갔어.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는 무릎을 꿇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은 거부했어. 적에게 굴종하는 삶 따위는.... 어쩌면 그때 우린 눈이 멀었던 건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 해.'(책 중에서)
마을마다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로 떠나고 더 이상 군인이 될 남자들이 남지 않게 되자 그녀들의 조국은 여자들을 전쟁으로 동원했다. 부상당한 남편을 대신해서 싸우기 위해, '신념'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얻기 위해. 나이를 속이거나 무작정 전선을 향해 출발하기도 했다. 군정치위원회를 무작정 찾아가서 참전 했다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한 여성은 친구 몇 명과 함께 간호사 양성과정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으로 배치 몇 달 후 직접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전선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녀들의 참전은 조국을 위한 아름다운 헌신이었다.
'....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두고 스탈린을 믿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니 눈이 먼 사람들이니 하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아. 그들은 스탈린을 믿은 게 아냐. 그들은 오히려 스탈린을 두려워했어. 레닌의 사상을 믿었지.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야. 나중에 사람들이 이름 붙인 것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믿은 거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바로 그걸 믿었어. (중략) 전쟁 중반에 우리 군대에도 훌륭한 탱크와 전투기, 좋은 무기가 생겼지만 신념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군대처럼 그렇게 강력하고 군기가 센, 유럽 전체를 호령한 그런 무서운 적을 물리치지 못했을 거야. 그들의 허리를 꺾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걸.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공포가 아니라 신념이었다고.'(책 중에서)
그녀들의 역할은 전통적으로 여자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간호병, 빨래병뿐만 아니라 최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소총병, 트랙터 기사, 통신병, 기계 선반공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병사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대장 등 남자들의 부대를 지휘하는 등 역할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을 대하는 여자들의 태도는 남자들의 그것과 달랐다.
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책 중에서)
아마도 전쟁을 대하는 여자들의 태도가 남자들의 것과 다른 이유는 주변 상황과 공감할 수 있는 힘에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일상 속에서,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임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들려주었다. 스스로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책 중에서)
한 여자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내가 전쟁터에서만 아름다웠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나, 이후 조국은 그녀들을 잊어버린다.
저자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여자들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으며,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고. 거기에는 남자들과 같은 허무맹랑한 무용담이 아니라 인간들이 있다고. 사람도,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하는 생생한 세계가 있다고. 하지만 여자들만의 그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것이 바로 그녀들의 고통받는 이유이며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라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이나 드라마틱하고 자극적인 어떤 것을 기대한다면 이 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혹은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합과 관련한 이념적인 어떤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 그녀들은 돌아왔으나 그녀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가웠다. 참전한 여자들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그녀들을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들을 창녀로 모욕했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에 참전한 여자들을 보통의 여자가 아닌 거칠고 험악한 남성적인 존재로 대했다. 또 어떤 경우 결혼에 실패하기도 했다. 전쟁터에서 만난 동료 군인과 결혼한 한 여자는 결혼 일 년 후 남편이 떠나갔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에게서는 전쟁의 냄새가 난다고.
조국은, 조국의 인민들은 그녀들을 외면했다.
왜? 그녀들을 전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조국이 아니었는가?
전쟁으로 얻은 육체적인 병은 그녀들을 힘들게 했다. 임신이 불가능하거나 신체장애를 갖게 되었고,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등 정신적인 장애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전쟁터에서의 경험 그 자체였다. 살인자였다는 자책감. 전쟁터에서 만난 상황 하나하나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비록 적이었지만 눈빛을 마주 보며 총을 쏘았던 경험은 마치 오늘 겪은 일인 양 매일 같이 살아오는 경험.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한 경험. 존경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된 시간들. 참전은 여성답지 못한 경험이었다. 아름다운 행위가 이제는 정상적인 여성으로서 하지 못할 행동으로 비난받는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한 여성에게 남편은 '정상인 여자라면 과연 전쟁터에 나갈 수 있을까? 그래서 당신이 정상아를 낳을 수 없는 거다.'라고 비난하며 그녀를 떠나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지난 이야기, 특히 여성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네들이 생각하는 전장 속에 여자들은 없는 존재재여만 했다. 만일 있었다면 그것은 여성답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중의 태도.
그녀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며 숨겨야만 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이야기할 공간을 잃어버린다. 그녀들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바쳤던 전쟁, 그녀들의 역사는 그렇게 잊혀 갔다.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조국은 왜 그녀들을 잊어버린 것일까? 지금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타지키스탄인이지만 그 당시 그들은 소비에트 연합의 인민들이었다.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이 남자들의 세계인 전쟁터에 여자들을 참전시켜야만 승리할 수 있었던 역사가 부끄러웠던 것일까?
저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책의 원고는 출간하기까지 2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렸으며, 심지어는 출간된 후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책을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사람들의 생생한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제까지의 역사책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기술할 뿐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한다. 거기에 사람냄새 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이름이 나올 뿐이다. 그래서 역사책은 일견 건조하고 차갑게 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역사책의 행간에서 '현실'이 그곳에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그 안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사람에 대히, 고통과 슬픔과 기쁨에대해 상상해야 한다.
이 책은 전쟁터, 그것도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특별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터에서 핀 제비꽃 한 송이에 조차 공감하는 여자들의 따뜻한 마음의 울림과 전쟁으로 인해 겪어야만 했던 감정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이 책을 흔히 보는 일반적인 역사책과 다르게 인터뷰 형식으로 썼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목소리 소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마치 그녀들과 마주 앉아 직접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녀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그래서 이 책은 고통으로 가득 차 아파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또, 이 책은 존재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개개인의 역사의 정당성과 존재 자치를 인정받았을 때 비로소 증명될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역사를 타인과 나눌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타인의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 또한 직면보다는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쪽을 택해왔고 그것이 이 책을 잠시 덮어두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읽었다. 아니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의 시간이 잊혀지지 않았음을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것으로 답해야 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