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희 Mar 25. 2018

엄마의 음악책

어르신들의 노래방


  몇 년 전 어르신들 사이에 효도 스피커가 유행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이 효도 스피커를 '어르신들의 노래방'이라고 부른다. 이 효도 스피커 상품은 인터넷 검색을 하면 수 없이 검색이 되는데, 원래는 어르신들을 위한 상품은 아니었다. 일반 저가 유무선 스피커에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트로트 음악 수 천곡을 장착해놓은 것으로, 어르신들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 결과 효도 스피커가 된 것이다. 한 때 이 스피커의 MR이 저작권 위반으로 뉴스를 탄 일까지 있는 걸 보면 어르신들 사이에서 어지간히 유행을 했었던가 보다.  


  노래 좋아하는 어르신들 치고 안 가진 이가 없다는 이 스피커를 엄마가 가지게 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다들 가지고 있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필하시던 엄마는 급기야 직접 사 오시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엄마가 스피커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어르신들 사이에서 효도 스피커가 얼마나 필수템인지에 대해 실태 파악이 전혀 안 되었던지라 엄마의 간절함을 잘 몰랐던 것이다.

  엄마가 사 오신 스피커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책자가 부록으로 달려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1번부터 3000번대까지 노래 제목이 인쇄되어있는 작은 책자였다. 엄마는 검지 손가락 끝에 연신 침을 묻히며 책자를 넘겨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틀어놓고 흥얼거리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꼭 하시는 말씀이 다른 사람들은 이 책자가 없다는 거였다. 즉, 다른 사람들은 스피커만 가지고 있는데 장사가 엄마에게만 노래 제목이 있는 책자를 서비스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암도 없어야. 나만 있더랑께. 장사가 암도 안 줬는디 할머니만 준담시로 줬당께."

  이 책자는 엄마의 소중한 음악책이 되었다.


  그런데, 소책자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책자에는 노래 제목만 나와 있어서 노래 가사를 아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던 것. 엄마는 수시로 우리에게 SOS를 보내셨다.

  "경희야, 담에 올 때 이 노래 가사 쪼까 차자와라."

  엄마 집을 방문하는 날은 부르고 싶은 노래 가사를 한 두 개쯤 적어 드리는 날이었다. 엄마 가까이 사는 언니가 가장 많이 적어드렸고, 가끔 방문하는 나도 엄마의 노래 가사 신청을 받곤 했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종이 쪽지에 가사를 적는 우리에게 무척 미안해하셨다.


노래방 기계야, 안녕

  자주 엄마 댁을 방문하기 힘든 우리 자식들은 좀 더 빨리 엄마가 가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막내 이모를 통해 톡의 세계에 입문하시게 된 엄마에게 인터넷에서 검색한 노래 가사를 갈무리해 보내드리는 것이었다.

 이미지로 갈무리한 가사를 손가락 두 개를 사용해 크게 확대하는 것을 엄마에게 가리켜드린 후 우리도, 엄마의 음악생활도 매우 만족스러워졌다. 우리는 바닥에 쪼그리고 엎드려서 가사를 적는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한편, 그사이 엄마 댁에 막냇동생이 인터넷을 설치해드리는 대 사건이 있었다. 드디어 엄마가 인터넷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시게 된 것이다.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이트는 당연히 유튜브다.

  "아야, 이 노래 가사 쪼까 차자바라." 엄마의 전화나 톡을 받으면 나와 언니는 유튜브를 검색해서 링크를 톡으로 보내드린다. 엄마는 유튜브로 노래 듣는 재미에 퐁당 빠졌다.


  엄마가 유튜브의 세계에 입문하신 후 한동안 우리는 엄마의 노래방 기계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이월 아버지 제사 참석하고 엄마에게서 노래방 기계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갓 돌 지난 어린 조카가 효도 스피커를 침대 아래로 떨어트렸는데, 어디를 부딪쳤는지 스피커가 그만 소리가 안 난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매우 애달파하셨다.

  "충전을 해도 전기가 안 켜져야. 어따가 수리를 맡겨야 쓰끄나."

  살펴보니 엄마가 워낙 부려먹은지라 조카가 떨어트린 것과 상관없이 수명이 다 한 듯 보였다. 우리 형제는 정성껏 엄마를 위로해드렸다.

  "엄마, 너무 오래돼서 그런 거야. 울 엄마 어쩌까. 스피커 고장 나서."

  "엄마, 듣고 싶은 노래 있으면 유튜브 보내드리잖아. 그거 들으면 돼. 그치?"

  "응, 응, 그거 들으면 되제."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위로가 되는 눈치가 아니었다. 새로 사드려야 하나, 어쩌나 고민을 하다가 문득 효도스피커가 카드가 들어있는 디지털 기기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장 메모리가 아니라면 꺼내서 핸드폰에 끼우면 핸드폰에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스피커 옆에 SD카드 슬롯이 있었다. 나는 당장 그 카드를 꺼내 엄마 핸드폰의 메모리카드 슬롯에 꽂아드렸다. 그리고 음악이 들어있는 폴더를 바탕화면으로 꺼냈다.

  엄마는 죽은 줄 알았던 음악이 핸드폰에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행복해지셨다.

  

엄마의 음악책

   핸드폰으로 노래파일을 확인하던 엄마가 갑자기 가방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셨다.

  "엄마, 그거 뭐야?"

  "응, 이거, 노래 제목이여. 딴 사람은 없고 나만 있는디, 하도 봤더니 이라고 되부렀다."

엄마의 음악책. 좋아하는 노래에 점도 찍어놓고 동그라미로 표시해놓으셨다. 정말 공부 열심히 하신 울엄마. 인정!


  엄마가 꺼낸 비닐봉지 안에는 구겨진 종이가 한 주먹 들어있었다. 그 구겨진 종이는 다름 아닌 처음 효도 스피커를 구입할 때 장사가 '엄마에게만 주었다'던 노래 제목이 들어있는 소책자, 즉, 엄마의 음악책이었다. 엄마가 그 음악책을 얼마나 열심히 보셨는지 앞 쪽 한 두 장은 이미 찢겨 사라졌고, 중간중간 반 쪽만 남아있거나 절로 찢어진 페이지가 처절했다. 맨 마지막 장에 언제 적어드린 것인지 모를 가사가 적힌 종이도 한 장 붙어 있는데, 이마저도 너덜거리는 실정이었다. 찢겨져 가는 노래집을 스카치테이프로 꼼꼼하게 붙이고 계셨을 엄마 모습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엄마의 음악책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이미 사라져 버린 책장은 어쩔 수 없겠지만, 남아있는 페이지나마 살려보고 싶어서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책자를 최대한 살릴 수 있을 만큼 펼쳐서 복사를 하고, 작은 클리어 파일을 한 권 구입한 다음 번호 순서대로 넣었다. 비닐봉지에 넣었으니 이제 침을 묻히니 않아도 될 터였다. 새로 만든 음악책은 된장 담으러 엄마네 가는 날 함께 갖다 드릴 터였다.


  새 음악책을 갖게 되신 울 엄마, 울엄마는 오늘도 열심히 노래 공부를 하신다.   

매거진의 이전글 늙은 말의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