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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May 14. 2018

4 '명암이 안 보여요'

소묘 수업에 대한 단상

소묘는 어쩌다
첫 수업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미술 시간, 미술교사들이 첫 수업의 주제로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아마도 소묘일 것이다. 대상의 형, 명암, 양감, 질감, 동세 등을 관찰하여 주로 한 가지 색으로 그리는 그림을 소묘라고 한다. 그런데, 소묘는 어쩌다가 대다수 미술 수업에서 첫 수업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소묘 수업의 장점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사물을 관찰하고 특징을 파악하는 훈련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대상의 명암, 색채, 질감을 찾아보고 재현하는 연습을 하기에 소묘만 한 것이 없다. 특히 평면을 입체로 변화시키는 마법인 '명암'이란 것을 배우고 익히는데 소묘만큼 유용한 것도 없다. 그리고, 소묘는 무궁무진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인물화 수업도 할 수 있고, 풍경화도 그릴 수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결합하여 현대미술 수업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준비물에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아직도 4B연필에 집착하는 선생님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필통 속에 들어있는 샤프펜슬이나 연필 한 자루만 있어도 가능한 것이 소묘 수업이다. 도화지가 없다면 교무실 복사기 옆에 쌓여있는 A4용지를 냉큼 들고 가면 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준비물을 갖추지 못한 신학기 첫 수업으로 소묘 수업이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명도와 명암 사이

한 가지 색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소묘를 하기 위해서는 명도와 명암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명도는 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를 말하는 것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회색은 검은색보다 명도가 높다.'라거나 '빨강은 노랑보다 명도가 낮다.'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물론, 명도도 절댓값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 다들 한 번 정도 들어봤을 명도 11단계가 바로 명도의 절댓값이다. 검정은 명도 0, 흰색은 명도 10. 총 11단계로 되어 있다.


명암은 빛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같은 명도의 물건도 빛이 닿는 부분과 닿지 않는 부분의 밝기가 달라지는 데, 이것이 바로 명암이다. 명도 0의 검은색 모자도 빛의 위치에 따라 보다 밝은 곳과 보다 어두운 곳의 구분이 생긴다.

따라서, 소묘로 사물의 입체감을 표현하려면 명암과 명도의 두 가지 개념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색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명도와 빛에 따라 변화하는 명암을 모두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명암의 단계

다음 그림은 미술 교과서의 일부분을 스캔한 것이다. 모두 한 번쯤 보았을, 미술 교과서에 소묘 단원에 꼭 나오는 '명암의 단계'를 설명하는 그림이다.


소묘는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하는 그림인 관계로 미술의 요소 가운데 형과 명암이 가장 중요한 학습 목표가 된다. 그리고, 이런 구를 그리는 수업은 물체의 명암과 양감을 표현하는 기술적인 방법을 익히기 위한 가초 학습에 해당한다. 이 수업을 끝낸 후 연필로 인물화 그리기를 하거나 풍경 스케치를 하면 학생들이 대상의 양감을 좀 더 익숙하게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 역시도 가끔 구 그리기를 했는데, 미술실에 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경우 삶은 달걀을 그린 적도 있었다. 미술과 예산이 없어서 구를 살 수 없었고,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달걀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다 그리고 나면 함께 까먹었다. 아이들이 달걀 그리기보다 가져온 달걀 먹기에 더 열중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터!!


그런데, 아기 주먹보다도 작은 삶은 달걀 한 개를 그리는데 필요한 수업 시간은 어느 만큼일까? 아이들은 삶은 달걀 한 개를 그리는데 무려 두 시간, 90분을 사용했다. 이는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표현하는 활동이 그리 만만한 활동이 아님을 말해준다.


먼저, 아이들은 매끄럽게 원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이것도 아이들은 어려워한다.) 그 원의 크기는 달걀보다 너무 크거나 작아서 안된다.

두 번째, 연필로 명암 단계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이때, 연필선을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사용해야 한다.

세 번째, 검은색 연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달걀, 혹은 구는 하얗게 보여야 한다!!! 명암 표현이 잘 되면 자동으로 하얗게 보인다.


미술교사들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명암 그리기가 아이들에게는 왜 이렇게 어렵고 재미없는 활동이 되었을까.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 넘치는 나이에 얌전히 앉아 연필과 지우개로 동그란 석고 덩어리를 그리는 활동이 어찌 재미있겠는가. 더구나, 선생님이 그토록 목메어 외치는 명암이, 반사광이, 하이라이트가 아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면, 그 수업은 재미는커녕 지겹지 않았을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이들이 명암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명암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못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칙연산을 알아야 방정식도 풀고, 미분 적분도 풀지. 명암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면서 어찌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온 것이 명도와 명암의 개념을 이해하고 실습해볼 수 있도록 만든 다음의 학습지이다.

왼쪽 상단의 네모칸에는 명도가 다른 다양한 색종이를 밝기 순으로 정리해서 풀로 붙여본다. 오른쪽 상단 빈 칸은 연필로 석고 사과를 그리기 위해 비워 두었다.

학습지의 마지막은 석고 사과 그리기로 끝난다. 명암을 관찰하기에는 흰색의 물체가 좋은데, 흰 구보다는 흰 사과가 그래도 그리기 낫지 않을까 싶어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는 후배의 도움을 받아 석고로 된 사과를 여러 개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뭔가가 불만스러웠다. 아이들이 명암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함무하던 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학창 시절, 미술시간이 제일 싫어했던 그분은 소묘 수업이 특히 힘들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명암을 보고 그리라고 하는데, 자신은 명암을 볼 수 없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교사가 된 현재까지도 명암이 안 보인다고 했다.

나는 한 동안 그분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분은 명암이 왜 안 보였을까? 나는 이렇게 잘 보이는데 왜, 왜 안보일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눈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나는 명암이라는 괴물이 누구에게나 인다는 생각이 미술교사들의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미술교사들은 시각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다. 우리는 빛을 받은 사물의 명암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실재 사물에 나타난 명암의 변화가 다소 안 보일지라도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잘 훈련된 눈은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그렇게 본다.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미술실에 석고로 된 구가 있다 할 지라도, 아이들의 책상 위에 올려진 구가 교과서의 예시 작품처럼 보이는 일은 절대 없다는 사실이다. 교과서 속의 구의 명암은 통제된 상황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광원만을 사용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 일상생활 공간은 여러 개의 광원에 어지럽게 노출되어 있다. 미술실(혹은 교실) 천정의 형광등 하나하나가 각각의 광원이고, 교실 양 쪽 창문에서는 태양빛도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실제로, 미술실이나 교실 책상 위에 물체를 올려놓으면 대여섯 개의 그림자가 생긴다. 어쩔 때는 어느 부분이 밝고 어느 부분이 어두운지 구분하기 힘들 때도 다. 그와 같은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하이라이트, 중간 밝기, 어두운 부분, 반사광, 그림자로 구분되는 명암을 표현하라고 하는 것은 시각적인 거짓말, 혹은 실재가 아닌 '개념'을 그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일상의 조명 아래에서 찍은 사과. 명암의 변화를 찾기가 힘들다.

해결방법은 하나다. 먼저, 교과서의 예시 작품과 같이 통제된 상황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즉, 하나의 광원 아래에서 사물의 명암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체험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수업을 바꿔야 한다. 이는 소묘 수업의 목적이 단순하게 명암을 알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시각적인 민감성을 기르는데 방점을 두고, 개념이 아니라 체험을 중심으로 수업을 기획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전거용 랜턴으로 빛의 위치를 바꿔가면서 찍은 석고 사과의 사진들. 교과서의 예시와 비슷한 명암의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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