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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Aug 06. 2018

14.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의심해보기

본다는 것에 대하여


기능 수업, 꼭 나쁘기만 한 것은....

몇 년 전, 학생들의 관찰, 표현 능력을 좀 키워보겠다고 형태 변화 요인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그릴 수 있고,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까.


미술 수업에서 주제나 창의성을 강조하다 보면 소홀히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기능 수업이다. 나는 미술 수업에서 기능 교육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미술 교육의 시류에서 본다면 분명 나는 구식의 교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능이 부족해서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예를 들어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표현하고 싶은데, 노랑과 빨강을 섞었을 때, 주황색, 다홍색과 같은 다양한 색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거기에 파란색을 눈곱만큼씩 섞어준다면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미묘한 보라색과 갈색을 얻어 저녁노을의 감동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게 된다면. 기능교육은 미술과 관련하여 참으로 효과적인 무기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닐까. 다만 주의할 일은 기능교육을 미술교육의 전부, 혹은 미술교육의 목표가 기능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수업의 목표로 녹여내고자 애쓰는 우를 범하지만 않으면 될 것이다. (기능을 익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해보는 것이지만, 국어, 영어, 수학 공부가 가장 중요한 입시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니, 미술 수업을 구조화하여 기능교육과 창의성 교육을 한 수업 안에 녹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왜 이렇게 그렸니?

눈높이, 눈의 방향, 물체와의 거리를 형태의 변화 요인이라고 다. 이 세 가지는 기말고사를 대비해서 이론으로만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다들 한 번씩 외운 기억이 날 것이다.) 형태 변화 요인은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사물을 관찰하기 위한 하나의 준거로서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사실, 이 세가지만 잘 이해해도 형태를 관찰하여 그리는 수업이 좀 더 쉬워질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따로 수업 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한 해에는 이 세 가지만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아래 학습지 참조)

좌:눈의 방향에 따른 형태변화, 우:눈높이에 따른 형태 변화(자료 출처:http://cafe.daum.net/dubucafe/)

첫 번째 활동인 눈의 방향에 따른 형태의 변화 활동에서는 컵을 주고, 방향을 바꿔가면서 그리게 했다. 대부분 교과서에 제시된 것과 같은 모양을 그려 내었다. 그런데, 눈높이에 따른 형태 변화를 그리는 활동에서 이상한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이 그린 것은 보드게임에서 많이 쓰는 젠가였다. 38명에게 동일하게 나눠줄 수 있는 물건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집에 있는 젠가를 가져와 하나씩 나눠주었다. 다들 알고 있듯 젠가란 물건은 길쭉한 직육면체의 나무토막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가 '정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림을 그렸지만 몇 명의 아이들이 역원근법으로 그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모양의 젠가를 그려놓았던 것이. 다음의 그림은 그때 아이들이 그렸던 것을 내가 재현해본 것이다.

왼쪽 사진:젠가, 오른쪽 사진:아이들이 그린 젠가

나는 아이들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직접 그려주기'를 시전 하고자 했다.

'왜 이렇게 그렸어? 여기서 보면 이렇게 보이잖아.'

'아니에요, 선생님, 이렇게 보여요.'


아이들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주장을 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나무토막을 나에게 내밀었다.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보자, 신기하게도 나무토막은 내가 알고 있던 것(그동안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해왔던)과 다른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이 아이들은 나무토막을 양 눈 사이, 미간 가깝게 놓고 그리고 있었다. 나무토막은 양 미간보다 좁았고, 그 때문에 형태의 왜곡은 더 심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즉, 가까운 곳은 좁게, 먼 곳이 넓게 보였던 것이다!


하나의 눈, 두 개의 눈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그것은, 우리 눈의 비밀에 있다. 카메라 렌즈에 빗대어 비교해보자면, 카메라는 하나의 눈으로 사물을 기록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카메라 렌즈가 바로 카메라의 눈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은 두 개다. 눈이 두 개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과의 거리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오른쪽 눈으로 본 사물의 좌표와 왼쪽 눈으로 본 사물의 좌표를 종합해서 사물과 나와의 거리와 깊이, 모양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믿기 어렵다고?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보면 된다.

먼저 오른쪽 눈을 가리고 걸어보자. 또는 왼쪽 눈을 가리고 걸어보자. 발걸음의 변화가 있는가? 아마도 걸음을 걸을 때 뭔가 휘청거리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는 한 눈만으로는 바닥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워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시 형태의 변화 요소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보자.

먼저 손바닥을 펴서 양 눈 사이에 세운다. 그런 다음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번갈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손의 모양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자. 왼쪽 눈을 감았을 때, 오른쪽 눈을 감았을 때 손의 모양이 어떻게 달라져 보이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보였다.

왼쪽 그림:오른쪽 눈을 감고 그렸다.  오른쪽 그림:왼쪽 눈을 감고 그렸다.
두 눈을 모두 뜨고 그린 그림. 뒷쪽의 앞에 있는 집게 손가락 보다 뒷쪽에 있는 가운데 손가락이 유난히 두꺼워보인다.


두 개의 눈으로 각각 사물의 형태를 파악한 후 이를 종합해서 거리나 깊이를 파악하는 것이 우리 눈이다. 사물과 눈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형태의 왜곡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눈과 사물의 거리가 충분히 떨어져 있다면 카메라의 눈과 사람의 눈으로 본 형태는 거의 비슷해진다. 학생들은 젠가를 비교적 눈 가까이 놓고 그렸던 것 같다. (하지만, 아주 가깝지 않아도 형태의 왜곡은 충분히 볼 수 있다. 위의 손 그림도 눈에서 거의 30cm는 떨어져서 보고 그린 그림이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절대 나타날 수 없는 물체의 모양을 우리 두 눈은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미술, 특히 서구에 뿌리를 둔 전통 회화가 재현하는 세상은 바로 하나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다. 물론 르네상스 이전에는 보는 방식이 다르기는 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회화는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기록했다. 세상의 중심은 신이고 신은 어디에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회화에서는 원근법이 무시되고, 그려지는 사람에 따라 거리도, 눈높이도, 눈의 방향도 무시된다. 신 중심의 세계이기 때문에 신에 가까운 존재, 왕이나 귀족, 사제는 늘 크게, 고귀한 색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반면 농민이나 농노는 하찮은 존재, 작고 희미하게 묘사된다. 르네상스는 카메라의 눈으로,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재현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대이다.


미술이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메라처럼 하나의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 마치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것과 동의어인 양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 교과서에 등장하는 관찰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카메라의 눈으로 대상을 기록하는 행위야말로 관찰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진정한 관찰 표현이란 나의 눈으로 보고, 내가 본 것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행위이다. 비록 '본다'라는 행위의 결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많이 다를 수 있고, 심지어 일부 물체의 왜곡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진짜 관찰의 결과인 것이다.


관찰 표현은....

미술교육학 책에 나오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한 아이가 눈사람 같은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려놓고 자신의 엄마라고 소개했던 것. 교사는 이 그림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아이의 엄마가 학교에 온 날 아이의 그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무척 체격이 좋은 아이의 엄마를 아이의 눈높이에서 올려다본 순간 아이의 그림과 똑같은 모습의 엄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일화야말로 관찰 표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지도교사가 '아니야, 너희 엄마는 이러저러하게 생겼어. 사람은 이렇게 그려야 해. 얼굴은 이렇게, 몸은 이렇게 그려야 해.'라고 이야기한들, 교사의 지도에 따라 아이가 교사의 지도대로 그려낸들, 그것을 과연 관찰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보게 되지만, 반대로 보는 만큼 '내가 아는 세계'도 넓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관찰 표현은 시각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그런 활동이다. 관찰 표현이 중요한 것은 '보는 행위'를 통해 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보는 활동을 통해 '보는 방법'을 알게 되는 그런 활동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더라도 그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관찰 표현의 힘이 아닐까.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의심해보기

미술교사로서 갖기 쉬운 오류 중 하나는 '객관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쉽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전문가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능을 믿는 마음이 큰 나머지 '본다'는 행위의 범주를 스스로 규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사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끔은 교사 자신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사실'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과신한 나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에 매몰되어 진짜 '보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의심해 보는 것, 변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해 보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창의성은 발현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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