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리를 하거나 화장실을 가야 돼서 잠깐 둘이 놀아야 된다고 부탁을 하면 잠깐이지만 둘이 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연년생 육아 전쟁이 끝나가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밋밋한 광대마저 승천하는 게 느껴진다. 행복 회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한방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불현듯 오래전 놀이터에서 만난 그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첫째가 17개월 무렵이었을 때였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만삭의 몸으로 헉헉 대며 아이와 놀아주고 있는데 한쪽에서 측은하게 쳐다보던 한 엄마가 있었다.
"혹시 연년생이신 거예요?"
"아 네..."
"아이고 힘드시겠다. 얘네들도 연년생이거든요. 저도 힘들었는데... 옛날 생각나네요."
"아 진짜요? 힘드셨겠어요. 연년생 어때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조금 나아졌어요. 5살, 4살인데 이제 둘이 좀 놀거든요."
뭐시라고라?? 둘째가 네 살은 되어야 같이 놀 수 있다고요?
그 연년생 엄마와의 짧은 대화 속에 그녀의 표정, 목소리에서 측은지심과 동질감이 느껴졌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네 살을 가늠하는 일은 땅 위에 지나가는 지렁이개수를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부질없게 느껴졌다.눈앞에있는 아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허덕이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가 둘이서 논다는 것의 중요성은 그 당시 개미 똥구멍에 불이 났다는 것만큼이나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아이 둘이 같이 잘 노는 게 엄마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난 그동안 '육아는 정말 힘들다!', '엄마는 극한 직업이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엄마들만 봐도 '저 엄마도 참 애쓰고 있구나' 절절한 마음이 들었다. 뿐만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이들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연년생이에요?"라는질문과 함께 어김없이"힘들겠다."라는 연이은 답을 하면 난 이런 말은 들어 마땅하다 생각했다. 스스로 특히 연년생 엄마는 정말 힘들다는 생각에 빠져 살았다.
사실 둘째 임신한 걸 알았을 당시 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지금은 이런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새 생명이 또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기쁨보다 부끄러움, 계획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그리고 지난밤 대책 없이 열정적이었던 우리를 원망했다. '내가 미쳤지. 우리가 미쳤지.'를 몇 번이고 허공에 외쳤다. 둘째에게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그땐 그랬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비롯해 지인들에게 둘째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축하보다는 '벌써?' '왜?' '조심 좀 하지.''연년생?''대단해'라는 뉘앙스의 말들을 먼저 들었다.
둘째 임신한 사실을 안 그날부터 연년생이라 너무 힘들다는 생각과 두려움에 줄곧 잠식되어 있었다.
그것이 연년생 육아의 출발점이었다.
출산 직후부터는 찐 연년생 전쟁이 시작되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의 첫째는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스트레스로 야경증을 네 달간 매일 앓았다. 처음 아이의 통곡을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이것이 야경증인지도 잘 몰랐다. 매일 새벽 같은 시간에 서너 번을 깨서 우는 아이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같이 울음을 터뜨린 날도 있었다.
그것뿐 아니라 아이는 불편한 동생의 존재를 밀고 소리 지르는 것으로 거칠게 표현했다. 19개월 아이에게 갑작스러운 동생의 등장을 이해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난 출산 직후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내려가서 지냈다. 한 껏 예민해져 있는 첫째를 신경 쓰니라 둘째 케어는 자연스레 친정엄마의 몫이 되어버렸다. 난 첫째만 전적으로 돌보았다. 아이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정엄마가 도와주신다고는 하지만 친정엄마와 둘이서 어린아이 둘을 하루종일 가정보육으로 돌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첫째는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수다를 떨고 계속 함께 놀아야 했다. 아침부터 밤잠에 들기까지. 둘째를 출산하고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있었는데 그렇게 다섯 달을 가정보육하니 번아웃이 와버렸다. 아이에게 소리를 치는 일이 잦아졌고, 하루 걸러 하루를 눈물바람 해댔다. 이 상황에서 좀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많이 너덜너덜 해졌을 때,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도 친정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어린이집에 다녔기에 잘 적응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끝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한 달 동안 매일을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며 울며불며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아이의 울음을 이겨내야 적응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가기 싫다는 아이를 강제로 원에 들이밀었다. 선생님은 원에서 아이가 통곡하고, 어떤 회유나 설득의 말에도 끄떡없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고집이 센 아이는 선생님마저도 지치게 만들었다.
아이에게 동생의 존재, 아빠와 떨어져서 사는 일, 낯선 어린이집에 등원해야 하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아이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침을 뱉고 얼굴에 침을 바르는 행위로 표현했다. 침 바르는 행위는 본인이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반복되었다.
아이의 상태가 심각해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우린 8개월 만에친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올라왔다.
올라와서 나 혼자 잘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은 막상 부딪혀보니 내 염려보단 작은 것이었다. 매일이 전쟁 같긴 했지만...(특히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한 날에는 두 녀석이 다 나에게 매달리며 안아달라 떼쓰며 울었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화내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편에)
'연년생이라 힘든 점만 있나? 좋은 점은 하나도 없나? 그래도 나 예전보다 덜 징징대는 것 같은데...'
여전히 어린아이 둘을 돌보는 일은 힘에 부친다.
아직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은 한 달마다 주기적으로 아프고,
번갈아가며 아픈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저질 체력인 나도 덩달아 아프다.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거나 말도 안 되는 걸로 떼를 쓸 때는
나도 모르게 컨트롤되지 않는 감정에 빼액~~ 하고 소리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사랑이고 찐행복이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지나가니...
행복도 두 배가 되었다.
40개월, 21개월 연년생~!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커가면서 자기들끼리 노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가고
하루가 달리 자라 가는 아이들을 볼 때 뭉클하고 몽글한 마음이 솔솔 피어오른다. 이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
아이 둘이 나에게 웃으며 '엄마'하고 달려와 폭 안길 때, 사랑한다며 뽀뽀해 줄 때...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함을 선물로 안겨준다.
또 두 아이가 손을 맞잡고 서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굴 때,난 눈에만 담아두기 아까워... 휴대폰을 꺼내든다.
내가 보기엔 고만 고만한데...
첫째가 말끝마다 '언니가~~ 해줄게.'라고 언니행세를 할 때면 피식 웃음이 나고... 둘째는 그런 언니를 지극히 따를 때 흐뭇하다.
가장 힘든데... 제일 예쁠 때, 행복할 때!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면 많은 분들이 관심을 주신다.
"연년생이에요? 아이고 힘들겠다! 근데 지금이 제일 예쁠 때네요."
"지금이 예쁠 때야. 내가 자식 키울 때는 그걸 모르고 키웠는데, 지금 보니 어린애들이 너무 예뻐."
"3살, 4살이면 가장 힘들 때네요. 근데 그때가 최고 행복할 때에요."
가장 힘들지만 제일 행복한이때! 의 오늘을 살며 그 의미를 아이들과 함께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