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해! 넘어져! 큰일 나! / [육아 편]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위험해!', '넘어져!', '큰일 나!'
아이들이 제 발로 걷고, 어딘가 기어오르기 시작하면 양육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지요.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너 그러다 다친다.'
'엄마는 그만하라고 했다. 넘어져서 아파도 몰라'
놀이터에서 다른 양육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들었어요.
어디 하나 부러지고, 피 철철 나봐야 위험한 걸 알지!
아! 우리는 왜 이렇게 걱정을 넘어 위협과 협박이 담긴 비극적인 말을 하게 된 걸까요? 과연 이런 말이 효과가 있을까요? 아니요. 전혀요. 이런 말을 들은 아이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보란 듯이 더 짓궂게 놀거나, 움찔해서 겁먹거나.
공교롭게도 제가 돌보는 두 아이 중, 한 명은 전자입니다. 분명히 제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이야기할 때 절 쳐다보고 찡끗 눈웃음을 지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달려 나갑니다. 뒤도 안 돌아봐요. 왠지 모를 분노가 차오릅니다. 너어, 내 말 다 알아들었으면서 보란 듯이 '거역'하는 거야? 오기가 나고, 부모로서의 자존감에 스크레치가 나요. 더 소설을 쓰자면, 아이가 날 무시한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쫓아가서 붙잡거나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릅니다. 실제로 이 아이는 까불다가 다리에 반깁스를 할 만큼 다치기도 했고요. 자주 넘어져서 입안에 상처가 없는 날이 드물어요.
다른 아이는 후자입니다.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고개를 떨구며 터벅터벅 제 다리 뒤에 숨습니다. 이것도 안타까워요. 조심해서 놀란 이야기지 그렇게 쪼그라 들 건 뭐야. 고작 이런 말에 포기하면 앞으로 어떻게 도전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겠어! 이건 이것대로 또 낙심되고 안타까워요. 어린이의 표정이 이렇게 슬플 수도 있나 싶어서 그냥 안아줄 뿐 말을 이어갈 수가 없어요.
말하는 나도, 듣는 아이들도 속상하고 결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 이제는 다르게 하고 싶어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뭘까요?
전 안심하고 싶어요. 아이가 다칠 까봐 노심초사하고 긴장하느라 에너지가 무척 많이 들거든요. 그러면서 아이가 신나게 지낼 수 있게 돕고 싶어요. 안전, 자유, 재미, 생동감, 여유, 신뢰, 존중, 돌봄... 이런 욕구들이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역하거나 순응하는 대결 상대가 아님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같이 행복하게 지내길 원하는 한 팀이에요.
비극적인 말을 내뱉는 저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네요.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할까 봐, 아이가 협조해주지 않아서 내 평화와 여유가 깨질까 봐. 그 두려움이 똘똘 뭉쳐서 센 말로 튀어나갑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가 제 불안과 걱정을 알아줄까요? 그래서 '네, 엄마'하고 알아서 안전하면서도 자유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양육자인 우리도 하지 못하는데요?
아이가 안전하면서도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떠올립니다. 주차장에서는 어른과 손을 잡고 걸으면 안전하다고, 공원이나 운동장에서는 맘껏 뛰라고. 내리막에서는 언제든 멈출 수 있을 정도로 달리라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으면 아직은 어른이 받아줄 수 있는 상황에서 도전해 보자고. 그러면 괜찮을 거라고요.
아이들을 보며, 마치 어린 저 자신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상상을 합니다. 부모의 돌봄과 따뜻한 시선 아래 지지받으며 지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실제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대신 아이들을 어린 저를 대하듯 대할 수는 있지요. 그래서 때론 육아가 큰 치유이자 회복입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오랫동안 자주 들었던 '위험해!', '넘어져!', '큰일 나!' 대신 이렇게 말해볼까요. '손 잡아.', '천천히 걷자.', '괜찮을 거야.'라고요. 이 말들이 아이들과 우리 자신을 꼭 안아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