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야,
지난 주말 감기 걸려서 괴로웠지? 초반엔 열이 나더니 막판엔 콧물이 흘러서 짜증 났을 것 같아. 우주도 뒤늦게 감기가 옮았어. 너희가 시차를 두고 같이 앓으니까 돌보기가 만만찮더라.
어제 너를 하원 시킬 때 엄마는 무척 피곤한 상태였어. 너희 돌본다고 전날 급히 휴가를 내는 바람에 일이 밀려서 하루 종일 바빴거든. 감기 끝물인 너는 오는 차 안에서도 집에 와서도 내내 딴지 쟁이였어. 바닥에 책을 잔뜩 꺼내놓고 뛰어다니다 책을 밟아서 미끄러질 뻔하지 않나, 엄마가 책 읽어주는데 같이 안 보고 자꾸 등을 올라타질 않나, 좀 살만한지 침대에서 또 뛰질 않나 (너 그러다 지난번에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서 몇 주 동안 대학병원 다녔잖아.)
엄마는 잔뜩 신경이 예민해져서 '밟지 않아', '올라타지 않아. 내려와서 같이 책 읽자', '뛰지 않아. 다칠까 봐 걱정된다'말했지. 너는 이내 토라진 것 같더라. 엄마 말에 잘 대꾸도 안 했잖아. 엄마는 너희가 겨우 나아가는데 또 다치 거나하면 그나마의 평화가 깨져버릴 것 같아서 불안했어.
겨우겨우 너희 둘을 먹이고 씻기고, 파자마로 갈아입혀 한숨 돌렸어. 아직 양치가 남았구나 하는 찰나, 네가 엄마한테 조심스레 다가왔어.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어. 아직 머리가 살짝 젖은 채라 엄마는 그걸 얼른 말려줘야지 또 생각하는데 네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엄마, 마음을 주세요
아, 순간 눈앞이 하얘졌어. 머릿속에 온통 너희를 돌볼 '일'만 보이고 정작 너희 자체는 돌보지 못했던 걸 들킨 것 같아 민망하고 부끄러웠지.
지구는 엄마가 널 좀 더 안아주고받아주고 달래주길 바랬을 것 같아. 몸도 아직 무겁고, 하루 종일 떨어져 있었으니 그럴만하지. 얼마나 엄마의 품과 다독임이 필요했을까. 그런데 엄마를 만난 후 내내 이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 하는 말만 들었으니 속상했던 거야. 그래서 말썽 부리고, 위험한 걸 알면서도 뛰고, 품이 여의치 않으니 등에 올라타서 네 나름대로 표현한 거지. 그걸로도 마음이 전해지지 않자 다듬고 다듬어서 '마음을 주세요'라고 말한 게 아닐까?
우주는 매 순간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편이야. '안아주세요', '읽어주세요', '여기 또 오고 싶어요'하고 말이야. 이유도 어찌나 구체적이고 소소하게 다 말하는지 몰라. 어제 킥보드를 타서 피곤하다는 둥, 저 누나가 친절하게 대해줘서 좋았다는 둥. 그래서 늘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때그때 필요한 걸 챙겨주게 돼.
하지만 너는 말수가 많지 않아. 그래서 소홀해지기 쉽지. 그렇다고 무딘 것은 아니야. 무척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걸 알고 있어. 다만 순간순간 자세히 표현하지 않으니 엄마가 놓치곤 해. 그러다 이따금 다듬어진 말을 툭툭 내뱉어 놀라게 한단다. 우주가 일상과 찰나를 잘 표현하는 에세이스트라면 너는 정제된 언어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시인 같아.
마음을 줄게. 온 마음을 다 주어도 채워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있는 힘껏 사랑하고 표현할게. 해야 할 일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가득한 머릿속에서 빠져나와 눈앞에 있는 너희를 우선 볼게. 볼 부비고 안고 눈 마주치고 들을게. 혹시 엄마가 또 '일 모드'로 바뀌어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으면 얼른 알려 줘. 그리고 지구야, 너에게 중요한 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다정하게 표현해주어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