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는 말, 가까워지는 말
2호야,
너는 요즘 부쩍 말이 늘고 있어. 어쩜 저런 말을? 싶을 때가 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른들이 한 말이나 책에 나온 대화들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아.
두 돌 전후로 아직 문장을 말하지 못하던 네가 갑자기 '코코아, 참 맛있다'라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나. 당시 즐겨보던 책의 세이펜 소리를 그대로 한 거였어. 그 후로 우리 가족들은 'OOO, 참 맛있다'라는 말을 즐겨 썼지. '커피, 참 맛있다', '계란말이, 참 맛있다', '오렌지 주스, 참 맛있다'를 비롯해 맛있을 때마다 이 문장이 참 유용했어.
그 후로, 바바파파 책의 여러 대사도 즐겨 써. 바바가족은 다같이 전 세계를 모험하고,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어서 표현이 정말 다양해.
이 책을 읽어주다 보면 엄마 아빠의 지식과 지평도 넓어진단다. 대왕오징어, 물소 같은 동물들도 엄마는 잘 몰랐는데 덕분에 알게 되었고, 화성에 사는 품품가족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었어. 네가 요즘 빠져있는 '토네이도'도 이 시리즈에서 비롯되었지.
읽는 책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얼마 전에는 디즈니의 카(Cars)를 봤어. 그 책에서 주인공 라이트닝이 경주에서 지고 난 후에 동료이자 친구인 메이트에게 '너 때문에 졌잖아'라고 말해. 너는 그 말이 재밌었는지, 또 네 심정을 대변해줘서인지 자꾸 쓰더라.
네가 그 말을 할 때면 언성이 높아지고, 상대를 탓하는 말이라 엄마는 마음이 쓰였어. 듣는 사람(집에선 주로 1호)도 기분이 나빠보였고, 네가 상대를 밀거나 벌떡 일어서기도 해. 그래서 하루는 너와 이 말에 대해 대화를 나눴지.
엄마 : 지구야, '너 때문에 졌잖아'라고 말할 때 기분이 어때?
2호 : 좋아!
엄마 : 그 말로 화나고 기분 나쁜 걸 표현할 수 있으니까 자꾸 쓰는 거야?
2호 : 응!
엄마 : 같이 놀던 친구가 그 말을 하면, 지구 기분은 어떨까?
2호 : 나빠. 속상해. (잠시 조용히 생각하더니) 내 잘못이 아닌데 (울먹)
엄마 : 맞아. 경기에 질 수는 있지만 서로 탓하고 소리치면 속상하겠다. 엄마 생각에... '때문에'는 '멀어지는 말'이야. (라면서 뒤로 주춤주춤)
2호 : (잠시 생각하더니) 멀어지는 말? 엄마 어디 가~
엄마 : 상대를 원망하고 그래서 서로 마음이 상하고 사이가 멀어지는 말.
대신에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경주에서 졌을 때 라이트닝의 기분은 어땠을까?
2호 : 속상하고 슬퍼.
엄마 : 그랬겠네. 열심히 달렸는데 졌으니까 속상하고 슬프겠다.
2호 : 그 말은 멀어지지 않는 말이야?
엄마 : 응! 만약에 친구가 속상하고 슬프다고 하면 네 마음은 어떨까?
2호 : (또 잠시 생각) 내가 안아 줄게.
엄마 : 아, 져서 속상한 친구를 안아주고 싶은 거야?
2호 : 응!
엄마 : 와, 네 덕분에 마음이 풀린다. 그래서 이렇게 가까이 가고 싶어.
(2호 쪽으로 다가가며) '덕분에', 이 말은 가까워지는 말이네.
2호 : (엄마를 와락 안아줌)
엄마 : '너 때문에 졌잖아'는 멀어지는 말이니까, 앞으로 그 말이 나올 때 잠깐 멈추고 다르게 해볼까?
2호 : 응!
그 후로 넌 며칠에 걸쳐 '너 때문에!' 하다가 읍! 하고 멈췄단다. 그리고 엄마를 쳐다봐. 그럼 엄마는 "우와! 우리 2호가 멀어지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네? 어려운 건데 해냈네?" 하면서 칭찬해 주지. 넌 어찌나 으쓱으쓱하는지.
반대로 '덕분에'를 쓰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이더라. '엄마가 도와준 덕분에 퍼즐을 다 했어'라던가, '1호 덕분에 재밌었어'라고 말할 때는 듣는 엄마 마음이 다 뭉클해지던걸.
들은 말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네가 앞으로 또 어떤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될까? 앞으로 엄마와 함께 여러 이야기 속으로 떠나자. 그 안엔 멀어지는 말과 가까워지는 말이 두루 섞여있겠지. 멀어지는 말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야. 다만 그때마다 이번처럼 너와 여러 감정과 갈등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며 연습하고 싶어.
'너 때문에 졌잖아'라는 말이 제법 입에 붙었는데, 그걸 2호가 멈추려고 노력하는 걸 보고 엄청 감동받고 자극되었어. 엄마와 아빠도 어른이라고, 원래 내 습관이라고 둘러대며 하던 대로 하지 않을게. 더 나아질 방법을 찾아 다르게 해 볼게. 네 '덕분에' 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