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히지 마세요. 메일로 보내세요.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줄이기

by 이진희


한때 유명했던 스킨푸드의 슬로건


생업인 일과 육아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 중에 신나는 일이 하나둘 생긴다. 시작은 '새 메일' 알림이다. 메일함은 으레 광고나 뉴스레터로 채워지기 마련이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랬던 메일함이 활력의 원천이 된 건 바로 내가 누군가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시작은 2021년 가을이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어느 TED 영상으로 데려다주었다. 루이즈 에반스라는 기업 컨설턴트의 발표였는데, 그는 우리 모두가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주 매력적이고 강력하게 전했다. 영상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그의 책을 찾아봤는데 아직 한국어 판은 구할 수 없어 아마존에 주문해 읽었다.

<5 Chiars 5 Choices>란 독립출판물이었는데 연극적으로 임팩트 있었던 TED 영상과는 또 다른 깊이가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문득 '이 책의 한국어 판이 아직 없다면 내가 번역해 보면 어떨까? 한국사람들에게 아주 명료하고 효과적인 툴이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디어를 묵히지 않고 적었다. 그리고 메일로 보냈다.


루이즈 에반스는 내게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답장을 보내왔고, 7시간의 시차를 넘어 피렌체에 사는 그녀와 오밤중에 줌을 통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이 책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와도 연결이 되어 계약을 맺고 작업에 들어갔다. (루이즈~ 새벽마다 틈틈이 하고 있어요. 올해 안엔 책이 나오게 해 볼게요!)



올해 봄엔 갑자기 만학도의 꿈이 생겼다. 내 학력은 모 선배의 말에 따르면 요즘 그 드물다는 학사인데... 대학 졸업 이후로 딱히 하고 싶은 공부가 없었다. 돌아보니 이른 나이에 월급쟁이가 되어, 회사를 쉬고 공부하는 데 대한 기회비용에 내내 발목이 잡혔던 것 같다.


그런데 스멀스멀 공부가 다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 이 관심사에 대해 단행본은 물론이고 우리말과 해외 논문을 꾸준히 찾아 읽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이 '이럴 거면 차라리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지 그래'라고 말할 정도였다. 몇 군데 학교와 전공 등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이거다!' 싶은 과와 교수님을 찾았다.


이 의지를 묵히지 않고 적었다. 그리고 메일로 보냈다.


유명하고 바쁜 교수님이라 메일도 많이 받으실 텐데 내 메일을 읽기나 하실까 반신반의했다. 이러저러한 주제에 관심이 있고 연구해보고 싶은데 그간의 학력과 경험은 이러하고 어떻게 시작해야 하냐는 다소 귀찮을 수 있는 메일이었는데 정성스럽게 답장을 주셨다. 심지어 몇 차례 회신이 오고 가서 가능한 것과 현실 가능성이 낮은 것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교수님, 영어 점수부터 다시 따야 해서 갈 길이 멀어요. 하지만 메일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최근엔 브런치에서 내가 나름 덕질하고 있는 한 작가의 새 시리즈를 접했다. 그 글을 읽는 동안 딱히 구체적이진 않지만, 마음속에서 불끈불끈 같이 아이디어를 키워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공통분모가 많은 만큼, 각자 가진 자원이 다른만큼 같이 하면 재밌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의지를 묵히지 않고 적었다. 그리고 메일로 보냈다.


요 메일은 보내고 약간 후회가 되었다. 보낸 행위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앞서서 횡설수설했기 때문이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보낸 편지함을 다시 읽어보니 새벽에 쓴 연애편지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수신자가 행간까지 읽어 정갈하게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무언가 와닿았다며 이야기를 구체화해 보자며 미팅 날짜를 정하기에 이른다. (작가님, 저 작가님 만나려고 휴가 냈어요!)




그래봐야 그간의 내 메일은 그저 작은 씨앗이자 말문을 여는 첫마디다.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거 해보고 싶은데?'라는 아이디어나 의지를 언어로 다듬어내고, 심지어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아주 능동적인 행위다. 이 자체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로부터 벗어난다. 발화하기 전의 나와 발화한 후의 내가 달라진다. 돌아보면 이렇게 확 지른 걸 수습하며 내가 많이 성장했던 것도 같다.


혹시 오해할까 덧붙이자면 '그래서 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류의 두루뭉술한 하소연을 여기저기 뿌리라는 게 아니다. 메일을 받는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도록 늘 배려해서 써야 한다. 그 메일이 수신자에게 감정덩어리나 짐이 아니라 선물이자 설렘이 될 수 있는 내용인지 두 번 세 번 고민한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아이디어나 의지가 떠돌아다니는가? 그게 당신뿐 아니라 수신자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무언가 기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묵히지 말고 한 자 한 자 적어라. 그리고 메일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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