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조직에서 디지털 일하기
제 직업이 라디오PD라고 하면 상대방은 어김없이 물어옵니다.
‘무슨 프로그램 만드세요?’
지난 3년동안 질문에 대답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소속도 자주 바뀌어가며 ‘KONG’이라는 앱을 관리하고,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이죠. 관련된 업체(음원사업자, 팟캐스트 등)나 다른 방송사들과의 협의도 업무의 일부였고요.
처음 이 팀이 만들어졌을 때, 저는 창업한 회사의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었어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스스로 정해야 했고, 디지털어쩌고저쩌고 근사한 일 같지만 실은 전화 놓고 책상 옮기고 랜선 까는 게 첫 업무였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부서에서 3년간 일하며 느낀 점, 시행착오를 나눠볼까해요. 말하자면, 아날로그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디지털 업무 해 보라'는 지시를 받은(혹은 더는 못 참겠어서 스스로 도전장을 던진) 분들에게 건네는 편지입니다.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으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디지털 플랫폼을 우선으로 하는, 가볍고 혁신적인 조직에 계신 분들은 도무지 이해 안되는 이야기일지도)
1. 초반의 마찰은 불가피
책상 옮기고 랜선 깐 이야기까지 했나요? 그렇게 사무실의 모양새를 갖추고나면 본 게임 시작입니다. 팀장 선배와 목표를 세우고, 업무체계를 만들고, 사람을 뽑고, 예산계획을 잡아야 하는데요. 아마 팀원들끼리도 중구난방일 거에요. 각자의 목표나 지향점이 다를테니까요. 장기적인 고민보다는 남들이 하는 것, 지난 수년 간 하고 싶었지만 못한 것들을 하느라 허덕일지도 모르고요.
뭘 해보려고할수록 자꾸 부딪히실 거에요. 부서 내에서 소화하기 힘들어서 기존 부서와 협업하자면 또 벽에 맞닥드립니다. 제 경우엔 데일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추가로 뭘 한다는 게 얼마나 버거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제작하는 동료들에게 제안하기가 어려웠어요.
갈등이나 마찰을 당연하게 여기고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요. 수십년간 해오며 시스템이 갖춰진 아날로그 업무처럼 매끄럽길 기대할수록 스스로 무능력하게 느껴지고 지쳐요. 아주 작은 성공에 기뻐하고, 대부분의 실패는 하루 세 번 돌아오는 끼니처럼 조금 무뎌져야 버텨요.
2. 디지털 = 젊은 직원의 몫?
원칙대로 하다간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기 힘들 것 같았어요. 저작권, 콘텐츠유통 등등 여러 부서가 다 맞아돌아가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면 한발짝도 떼기 힘들어요. 각 부서에서 키맨-말이 통하는, 기존 원칙을 잘 알지만 융통성도 갖춘 능력자-이 누구인지 알아내서 도움을 요청해 보세요. 예산상황이나 규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비공식(?)적으로 작게 시도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초반엔 디지털 마인드나 콘텐츠 감각보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기존 조직에서 디지털 업무를 ‘애들’에게 맡겨버리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난한 협의와 제도적 해결은 실무를 이해하면서도 경험이 많은, 시니어 그룹이 더 잘할 수 있거든요.
3. 실상 힘든 건, 구분짓기와 두려움
이런 저런 시도를 해도 당장 성과가 나지 않으실 거에요. 수익이요? 아날로그 콘텐츠 시장보다 힘들면 더 힘들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점은, ‘그건 너네 일’이라는 구분짓기와 ‘사실 나도 잘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구분짓기는 제가 어떻게 노력한다고 달라지기 어려워요. 조직의 리더가 디지털을 목표로 천명하거나 밀어붙여도 쉽게 바뀌지 않더라고요. 소정의 성과가 나서 차근차근 달라지는 걸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밖에요. 때로는 외부의 큰 성공으로 훅~ 체감온도가 바뀌기도 하고요.
두려움도 여전합니다만 그래도 이 그래프를 보면서 위안을 삼았어요.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오해를 떨친 것만으로도 큰 걸음 뗀 거라고 자위하면서요. 여전히 이 그래프의 바닥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는데 언젠가는 변곡점을 만나겠지요.
4.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독자 콘텐츠(모바일용 콘텐츠, 팟캐스트 등)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초반엔 기존 프로그램을 디지털 환경에 맞춰 재가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때문에 제작진들과의 협업이 무엇보다 중요했지요.
쉽지 않았어요. 인원으로 따지면 디지털과 아날로그 인력이 팀장 선배 포함해서 1:60 정도였거든요. (3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답니다. 세상은 휙휙 바뀌지만 사내에서 디지털 파트로 리소스를 옮기는 일은 그만큼 더뎌요. 다들 필요성은 절감하지만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요.)
초반엔 커뮤니케이션을 잘해서 조직의 디지털 감수성이 늘어나는데 기여하고 싶었어요. 가시적인 결과도 내놓고 싶었지요. 지나고보니 그건 스스로에게나 조직에게나 무리더라고요. 그걸 깨달은 후로는 여력을 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일했어요. 찾아보면 분명 고군분투하는 한두 명이 있을거에요. 그런 파트너들과 작은 성공을 만들어 가세요. 의욕까지 만들어주긴 힘들어요. 동기유발이 스스로 된 사람들에 집중하세요.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잖아요.
5. 앤터치면 뙇! ...같은 건 없음
이제 팀 내부로 눈을 돌려볼까요? 전공은 문과에 줄곧 아날로그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 저에게 개발자나 기획자들과의 대화는 외국어와 다름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럭저럭 사람말(?)과 기계어를 통역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메타데이터니 CMS니 SCF니 클라우드니 낯선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죄송하지만 그게 뭐에요’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건 방법이 없어요. 연차고 경험이고 다 내려놓으세요. 책도 많이 찾아 읽고, 생전 갈 일 없는 세미나에서 귀동냥을 할 밖에요.
초반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적어도 '엔터치면 왜 뙇! 안 나오냐' 같은 무식(?)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사용자가 편한 서비스일수록 뒷단에서 개발자, 기획자, 운영자가 그만큼 더 고민하고 노력(=노가다)해야한다는 걸 아니까요.
6. 이걸 누가 보거나 듣겠어?
어느 정도 팀이 자리를 잡자, 다양한 분들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의견을 구하셨어요. 한 후배는 프로그램에서 풀기 힘든 화두를 팟캐스트로 풀어내고 싶어했고, 한 선배님은 오랫동안 제작하며 쌓인 내공을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하고 싶어하셨고요.
처음엔 '이렇게 해보시라' 방법과 수단을 알려드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게 기대하는 게 비단 실질적인 도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요즘은 그저 들어드립니다. 아이디어와 시도하고 싶은 마음을 평가하거나 제단하지 않고 격려와 지지를 건내지요. 새로운, 기존 업무영역을 넘어선 일을 시작하자면 두렵고 움츠러들테니까요.
신나게 아이디어를 풀어 놓다가도 막판엔 '근데, 이런 걸 누가 들으려고 할까?'라며 꼬리가 내려갑니다. 그럴 때면 제가 모니터하는 콘텐츠들을 공유해드려요. 아무도 관심없을 것 같은 소소한 콘텐츠가 켜켜히 쌓여서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멋진 사례들을요. 편성의 제약 없이, (아직까지는) 까다로운 심사 없이, 지구 곳곳의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그게 디지털 콘텐츠의 매력이자 힘이잖아요.
앞으로 누군가 '이걸 누가 보/듣겠어~'라고 묻는다면 저는 대답할 겁니다.
"그러게요~ 그걸 누가 보/듣고 싶어할지 저도 궁금해요? 어떻게 그들에게 가 닿을까요?"
7. 아날로그적인 당신도 괜찮아요
지금이야 일 때문에 유투브와 페이스북을 많이 보고 인스타도 여러 계정을 운영하지만 집에는 여전히 이 일을 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컴퓨터도 없고, wifi도 안 터지며, 하물며 TV도 없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디지털 업무를 하냐고요? 그러니까요. 그런 저도 하는데 여러분은 더 잘하실 수 있어요.
8. 가욋일이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개별 실무자보다는, 의사결정권자에게 드리는 당부입니다. 디지털을 더이상 개인의 취향이나 노력으로 치부하지 마세요. '니 취미생활하는데 왜 회사 자원을 쓰냐'거나, '그럴 여유있으면 하던 일(지상파업무)이나 잘하라'고 구박하지 마세요. 지금의 여건에서 디지털 콘텐츠를 시도해보려는 친구들은 이미 지상파 업무도 열심히 하고 있을 겁니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공부하러 가려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오히려 독려하세요. 기존 업무의 비효율을 기술로 해결하고, 그래서 남는 리소스가 있다면 방만하게 운영되지 않게 시스템으로 컨트롤 하세요. 그리고 그 여유 분의 리소스 + 신규 리소스를 오롯이 디지털을 '시도'하는데 쏟으세요. ('성공'이 아니라 '시도'에요.)
김완 한겨레21 기자도 인터뷰를 통해 같은 이야기를 하네요.
한겨레는 내부 출연료를 주긴 한다. 만일 기사 전파를 위해 여러 플랫폼에 나가는 게 중요하다면 특화된 기자 개인기에 의존할 게 아니라 트랜스플랫폼에 맞는 역량을 갖추도록 언론사 차원 직무교육이나 보상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가욋일로 치부해버리니까 나서지 않는 것이다
저도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에요. 10-20대를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는 고백컨데 이제 못 따라가겠어요. 그저 제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계속 도전하는 수 밖에요.
3년을 지나보니 적어도 초반처럼 무리하다 지쳐 나가떨어지거나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으며 어디에선가 고분군투하고 계실 여러분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