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협동조합 입문기 (3) - 설계의 시작
집 자체는 넓지 않아도 수납공간이 충분하고 층고가 높았으면... 마당까진 아니어도 실외공간이 있었으면...
우리의 바람이었습니다. 마침 남아있는 집이 꼭대기 층이었어요. 다락이 있고 테라스가 널찍했습니다.
평면은 괴상했습니다. 대지 모양과 일조권 사선제한에 맞추다보니 실내는 동서로 길고, 테라스는 사선으로 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구석구석 사다리꼴과 세모 공간이 생겨났지요.
막막했습니다. 복도형과 현관형, 판상형과 타워형, 3베이니 4베이니 하는 아파트 구조는 익숙하지만 저희 앞엔 백지 뿐이었으니까요. 정사각이나 직사각도 아닌 평면을 보니 눈앞이 하얗더군요. 물론 셀프건축(?)이 아니기 때문에 평면설계를 직접 하진 않습니다. 당황하고 있을즈음 건축가 선생님께서 평면은 신경쓰지 말고 일단 평소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이야기를 들려달라시더군요.
그제서야 돌아봤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지? 그걸 공간에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
건축이나 인테리어, 리모델링 같은 단어로 인터넷 검색을 해봐야 그림같은 남의 집 이야기입니다. 정작 우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돌아봐야 하지요.
가족구성원들이 이런 질문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 출근하기 전과 퇴근 후에 집에서 뭘 하는지
- 지금 사는 곳에서는 뭐가 불편하고 아쉬운지
- 주말엔 어떻게 보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 입식이 좋은지 좌식이 좋은지
- 좋아하는 시간대와 계절, 색, 느낌, 온도, 빛, 소재
- 힘들어하는 시간대와 계절, 색, 느낌, 온도, 빛, 소재
구체적인 상황도 상상해 보았어요.
- 장을 보거나 배달받아서 들일 때
- 퇴근해서 쉬면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때
- 지인들을 초대해서 같이 먹고 떠들 때
- 아이들이 생겨서 자라고 뛰놀게 될 때
- 집중해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이런 상황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누리고 싶은지 고민했죠.
개인공간은 아늑하고 조용하고 다소 어두워도 무관했어요 (침실, 서재)
공유공간은 트여있고 밝고 가급적 아무 것도 없었으면 했고요 (거실, 테라스)
기능공간은 크진 않아도 야무지고 효율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요리, 세탁, 수납)
직접 설계를 하진 않지만 스스로 고민해보고 싶어서 틈틈이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어요. 제도나 경험담은 한국 저자들의 책을, 공간배치는 협소주택의 대가인 일본 저자들의 책을 참고했습니다.
(설계 외에 집짓는 전반에 걸쳐 찾아 본 책들은 후에 별도의 글로 정리할 예정)
* 건축주, 건축가, 시공자 사이의 의견조율이나 집 짓는 전체 과정을 조망하는데 도움이 된 책
* 건축의 기본 요소와 공간매치의 원리를 아는데 도움이 된 책
* 소소한 아이디어로 공간에 라이프스타일을 살릴 방법을 알려준 책 (사례가 많아서 큰 도움)
인테리어 보다는 '공간배치'에 유념해서 하나하나 채워갔습니다. 착공이 1년 넘게 늦어진 덕분(?)에 공부할 시간도 충분했죠.
그 사이 사건사고도 많았습니다. 제천에서는 화재가, 경주에서는 지진이, 겨울에는 수십년만의 한파가 닥칩니다. 그 때마다 설계도 덩달아 공중부양합니다. 내진 설계가 잘 되었는지, 화재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 베란다나 실외 공간의 한파 대비는 충분한지. 평면도 평면이지만 외장재나 구조에 대한 이야기도 꾸준히 오갔습니다.
건축가의 설계가 끝난 후엔 시공 실무자가 다시 평면도를 보며 상담을 합니다. 마감재와 조명, 전기배선, 수도 위치를 잡아야 하니까요. 그 와중에 다시 설계에 영향을 끼치는 이슈가 생기면 건축사무실로 돌아가기도 하고요.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서 완성된 평면도입니다.
어떠세요? 처음 하얀 공백을 접하고 멍~했던 순간에 비하면 놀랍지요?
그리고, 다시 지우고, 또 얹어보고... 저희는 물론이거니와 건축가 님과 건축사무실 스텝분들, 시공담당자 모두가 각자 그런 정성과 시간을 들였겠지요. 이 평면도가 실제 공간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참 설레고 궁금합니다.
뱀다리)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이 동엔 엘리베이터가 없답니다. 저희가 동참했을 때는 먼저 준비하고 있었던 조합원들이 엘리베이터 없이 짓기로 결정한 상태였거든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들어가면 일정 면적을 차지하고, 건축비가 증가하며, 공용전기요금과 관리이슈가 발생합니다. 이 동의 조합원들은 엘리베이터 면적을 개별가구가 반씩 확보하고 공용전기요금과 관리이슈를 줄이길 원했습니다. 5층 이상이 아닌데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면 반 환경적이라는 의견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전해 들었어요.
4층을 걸어다니는 게 괜찮을지 사실 여전히 마음에 걸립니다. 통상 빌라는 육아 중인 신혼부부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유무가 매매나 전세가에 영향을 준다고 들었거든요.
우리는 지금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3층에 삽니다. 여기서 한층 더 오르고 내리는 게 아직은 그닥 힘들지 않을 것 같아요. 가족구성원들이 아직 젊(?)으니까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불편한 점보다는 좋은 점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회한의 한숨을 짓게 될지도.
엘리베이터에 관한 기억 하나 더. 단독주택에 살 때 현관을 열고 마당을 거쳐 대문을 지나 동네골목으로 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참 좋았습니다. 마당의 화단 곳곳 뭐가 더 자랐는지 살펴보느라 시간이 걸리긴했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긴 시간은 아니어도 좁은 공간 안에서 낯선 사람과 어색하고 답답하게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전 엘리베이터가 조금 무서워요. 문이 여닫히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그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