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데 죽고 싶었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by 기린

죽고 싶다.


남자친구가 나를 보고 눈물을 머금는데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왠지 멋지게 마셔보고 싶어 들이켰던 데킬라 때문인지, 신경성 위염이 도진건지,

속도 더부룩하고 머리가 너무 아팠다.


나는 또 뭐라고 드라마퀸처럼 냅다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을까.

저 사람은 내가 뭐라고,

내가 속상해하는 게 속상하다며 저리 눈물을 흘려줄까.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왜 하필 이 순간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정말 구제불능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종종 질투했다.


내가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사람을 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잖아.

이 모습이 멋지지 않은 건 알지만(솔직히 구리다), 나는 나를 이해한다.

나라도 나를 이해해주어야 한다.


정말이지 남자친구와 그의 누나, 가족들의 대화를 보고 있자면 조금 부러웠다.

심지어 가끔 그의 누나가 철없는 말을 내뱉는 걸 볼 때는

정말이지 배알이 꼴리고 배가 많이 아팠다.


자녀의 선택을 온전히 지지해 줄 줄 아는 부모님 아래,

적당히 유복하고 적당히 화목한 저런 가정에서 크고 자라는 삶은 어떤 삶일까.


어느 집이나 어두운 구석은 있겠다만

(구석구석 잘 모르는) 내가 타인으로서 들여다본 그의 가정은

꽤나 안온하고 괜찮아 보였고, 부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니었는데,

그냥 내가 남자친구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내가 3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결혼 시장에서 꽤나 큰 페널티임을 익히 알고 먼저 위축되어 있던 나는

예비 시부모님이 했다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크게 의미 부여를 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

과년한 딸에게는 해당되지 않던 것이 예비 며느리(나)에게는 문제시되는 듯한 느낌.

혼자 상상에 상상을 더해 (사실과는 달랐다),

부모님에게 결혼을 결사 반대 당하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설움이 북받쳤다.


"걔는 되고 왜 나는 안 돼?"

한 문장을 뱉고 어린아이처럼 퇴행해서 와아아 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기는 빤스였는데.

그 당시 나는 정말 진지했다.


중간에서 말 한 번 잘못 옮겼다가 (의도와 다르게) 오해를 사 당황한 남자친구는

계속 해명을 시도하다가, 나를 안아줬다가, 눈을 쳐다봤다가

돌연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울게 한다.

알 수 있었다. 저 글썽이는 눈물이 진심인 걸.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내가 슬퍼하니깐 자기도 슬펐다고 했다.


이런 남자를 만난 게 복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부모 복은 그다지 없었지만 남자는 잘 만났구나.

나 사랑받고 있구나.


그런데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였을까.

그렇게 애정과 인정을 갈구했던 부모에겐 받지 못한 사랑을 이제야 받아서?

아니면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어야 결혼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서?

나중에 이 사람에게 혹시 또 실망할 일들이 생길까 봐 불안해서?


아직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죽고 싶었다.

그냥 무덤덤하게,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받고 사랑받는 (비교적 행복한) 순간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정말 구제불능이잖아.

죄책감이 들었다.


어쨌든 나를 걱정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는 내가 그 생각을 했다는 걸 비밀로 해야지.

이상해 보일 테니까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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