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세상] 7. 피(P) 묻은 J

by 기리니

불확실함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 못지않게 호기심은 어마무지하다. 모르는 미래를 살짝 내다보듯 타로나 사주가 유행했고, 모바일이나 신문에서는 별자리 운세가 성행했다. 혈액형을 소재로 한 웹툰이 인기였고 혈액형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정의하며 구분했다. 그러다가 MBTI까지 유행선을 타버렸다.


성격유형검사인 MBTI는 심리검사의 일종으로 사람들의 선호 경향을 토대로 성격의 유형을 총 16개로 분류했다. 그중 사람들에게 재미거리와 분란거리를 준 요소들이 있었는데, 바로 '판단 기준(사고형 T, 감정형 F)'과 생활 방식(판단형 J, 인식형 P)'이다. 공감의 정도가 달라 웃기고 슬픈 해프닝을 만들어내는 패러디 영상들, 생활 방식에 따른 과장된 영상들이 줄을 이었다.




20대에 내가 일한 직종은 서류 업무가 많은 곳이었다. 복지시설로, 예산을 국가에서 지원받기 때문에 행정 노동력이 많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업무의 디지털화가 곳곳에 확산되어 갔지만 여전히 자체 회의록을 만들고 계획서가 수두룩한 그런 곳이었다. 즉 업무 프로세스의 최신화가 다소 더딘 곳 말이다.


회의록, 사업계획서, 결과보고서, 정산자료 등 모든 것이 문서로 만들어졌다. 이런 곳에서 '업무를 잘하는 능력'에는 '문서를 잘 다루고 만드는 능력'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부분에서는 난 어떠했냐? 나는 '잘하는 직원'이었다.


"문서 정말 잘 만들어."

"너무 깔끔하다. 참 구조화를 잘하는 것 같아."


여러 번의 이직, 여러 명의 상사, 여러 환경들.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깨닫고 버티며 응용해 나갔다. 나를 믿고 (혹은 질투하는) 직원들이 여럿이었고, 업무적으로 나를 의지하는 상사들이 많았다. 대체로 나를 신뢰하며 업무를 맡기고 내 말에 편을 들어주었다. 이런 내가 MBTI 'P(인식형)'라고 하면 의외라고 하는 반응이다. 당연히 'J(판단형)'일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나의 노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에 적합한 페르소나를 만들었구나, 하며 스스로 우월감을 느꼈지만 이젠 다른 시선으로 나를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이 또한 강박이구나. 기본적으로 귀찮은 것은 싫어하고 스스로의 일에 있어서는 적당히 괜찮으면 넘어가는 스타일이었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컸다. 스스로의 실수에 대해, 동료들보다 열등한 것에 대해 견디기가 힘들었다. 정말 '다 잘하고'싶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업무를 마무리하고 싶었고, 생각보다 일의 진척이 되지 않아 상사한테 보고를 하며 업무 시간을 연장해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서류에 오타가 있는 것도 싫었고, 표의 테두리 굵기 하나가 다른 것도 싫었다. 프로그램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였고, 내가 하지 못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일 처리를 해나가는 동료들을 보면 질투와 자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모두가 느낄법한 그런 업무적 아쉬움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감정들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일을 하면서 1년에 한 번씩은 원형탈모를 겪은 것 같다. 50원에서 100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로 맨들맨들한 두피가 뽀얗게 드러나면, 그걸 만지면서 내 심리 상태를 가늠했다. '아, 내가 스트레스가 많은 상태군.'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참 많이 버티고 있었구나. 가끔씩 가슴에 불덩이 껴안은 듯 답답함을 느끼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내 성향을 억누른 강박이 부른 억지였구나. 우스갯소리로 말하듯 정말로 피(P) 묻은 J의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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