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사고가 힘든 점은 그 속성이 '침투적'이라는 데에 있다. 원치 않는 생각들, 비합리적이라고 인지되는 생각들조차도 그야말로 나를 단숨에 몰아붙여 버린다. 때마다 찾아오는 기념일, 혹은 반갑지 않은 손님마냥 강박사고는 '나에 대한 평가, 미래에 대한 계획, 관계에 대한 회의, 사랑에 대한 원초적 의미,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허무'를 반복적으로 각인시킨다. 불안을 기저로 하는 강박증인만큼 모든 것이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특히 나의 밤까지 뺏어 숨을 죄여오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이제는 돌아가신 친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교회를 다니면 만사가 형통할 것처럼 여겼고, 친구나 연인을 교회에서 만나 교류하기를 원하였다. 교회를 가게 하려고 늦은 밤 어린 나의 어리광을 받아주거나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긁어주거나 달달한 간식을 만들어주곤 했다. 가상한 노력 덕에 몇 번씩이나 교회에 나갔었고, 달란트 시장이나 여름성경학교에 참여하며 때론 신실한 마음의 불꽃을 태워보기도 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여름성경학교 때나 청소년 예배에서는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교하거나 관련된 프로그램을 종종 진행했다. 그중에 하나는 지옥과 천국을 경험해 보는 '천로역정'이다. 무섭고 공포스럽고 괴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지옥을 체감하게 한 후, 죄를 사함 받고 안식과 평안의 천국을 경험하게 한다.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것이 썩 좋은 기독교 프로그램은 아니었던 듯싶다. 나는 자주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 두려움은 불안을 넘어 공포로, 공포를 넘어 공황과 같은 심리적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불안은 때로는 구체적이고 때로는 추상적이었다. 원작인 웹툰을 시작으로 이후 영화화 되어 천만관객까지 달성한 한국영화 '신과함께'. 아무 생각 없이 시리즈 1편을 보고서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밤잠에 시달리고 말았는데, 영화에서 묘사된 지옥의 형상이 밤새 나를 숨 막히게 한 것이다. 나 또는 가족이 그런 일을 겪게 될 수 있는 걸까,라는 불안감에 마음의 온도계가 제 온도를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차갑고 뜨거운 그 심장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불안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뒤로 나는 그 영화가 나오는 장소에 있다면 상대방과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채널을 잽싸게 돌려버리기도 했다. 이런 식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넷플릭스에서 나온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재미있어 보여 유튜브로 시도했다가 그 마저도 얼마 보지 못하고 바로 꺼버리는 것이다. 비단 매체뿐만이 아니라 때때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인지, 인지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죽어서는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갖게 될지. 어떤 경계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어디로 가는지··· 그럼 가족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어째서 죽음 뒤에 삶은 이토록 유유자적 흘러가는지,
따위의 많은 혼란으로 휩싸이게 되는 것이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 모든 것이 침투적이고 쉬이 사라지지 않는 환영 같은지라 난 그 환영 속에서 길을 헤매이며 겨우 뜬 아침햇살에 위로받곤 한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게 어른스럽다거나, 나이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한다거나, 너무 생각이 깊고 많다는 이야기를 한다. 때론 긍정적인 뉘앙스로, 때론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람이란 주체적이면서도 제 뜻대로 마음과 사고를 조율하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강박사고는 그야말로 저항 없이 켜지는 스위치에 눈이 멀어버리는 정도로 스스로 조절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빛이 잠잠해지고 그제야 온화해진 햇살에 위로받을 수 있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아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