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을 앓으면서 혼자서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마음을 졸여왔다. 증상들은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침습적으로 다가오는지라 예비도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불안의 소용돌이에 그야말로 휘몰아치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것이 강박이라서 한편으로는 다행인 기분도 든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강박행동에 대해서는 좋은 여지를 두긴 어렵지만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졌다.
그렇지만 나를 불안하게 하는 강박사고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중요시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가능했다.
완벽하고 싶은 열망은 내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다하는 기저가 되었고,
삶에 대한 반복적인 두려움은 삶을 더 찬미하고 깊이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합리적인 신념은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고 채찍질하는 교사가 되어주었고,
과도한 도덕의식은 내가 삶에 따뜻한 태도를 갖고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를 조금 아프게는 했지만 적어도 남들에게는 상냥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마냥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강박이 주는 이면의 살가움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의미로 강박사고는 내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지표가 되었다.
[불안하다 → 강박사고를 한다]의 사고체계가 아닌
[강박사고를 한다 →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는 '불안'을 느낀다]처럼 역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공포에 대응하는 교감신경계의 신호처럼 나의 강박은 심리적 상태를 자가진단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완치라고도 할 수 없는 이 마음의 병은 내가 의미를 모를 때부터 시작되어왔고, 제대로 된 진단도 치료도 받아본 적이 없다. 조금은 덜 불안한 이 평온의 상황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지나왔었고, 많은 시간 동안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하고 탐색해 왔었다.
물론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더 젊은 사람들에게는 전문적인 치료를 권하고 싶다. 얼마나 홀로 고통스러울지 아니까. 그렇지만 병원에 가지 못할 상황도 이해한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단 하나.
불안과 강박 속에서 휘몰아치듯 아프겠지만 그 마음 안에서는 해석가능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통 속에서도 지금 내가 이렇게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