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막 봄이 오려고 하는 2월이었다. 어쩌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함께 달리자고 했다. 하! 이런 저주할 달리기라니. 여자가 활동하는 동호회에 가입하고 뛰기 시작했다. 난 습관적으로 많이 걷는 사람이다. 그날 이후 걷기보다 더 많이 뛰기 시작했다. 슬픈 날엔 더 많이 뛰었다. 잊기 위해서 달리고, 그리울 때 달리고, 보고 싶을 때도, 분노가 날 망칠 때도 달렸다. 복잡한 일이 늘어날 수록 더 달렸다. 나에 대해 실망할 때도 달렸고 살아갈 힘이 없어 지칠 때도 달렸다. 마라톤의 4계절(季節)을 보고 싶었다.
달과 화성과 금성이 한 줄로 늘어선 날이다. 밤하늘이 예뻤다. 관문체육공원에 처음 나가 달렸다. 토요일 정기모임에 나가 인사를 하고 회원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뛰는 길은 아름다웠다. 양재천은 언제나 도도히 흐르고 윗물은 변함없이 아랫물을 밀어냈다. 매주 토요일에 영동 1교 다리 아래 모였다. 잠실 방향으로는 탄천과 양재천이 합쳐지는 등용문을 돌아오거나 장거리 훈련 때는 잠실 철교까지 뛰었다. 과천 방향으로는 관문체육공원까지 왕복했다. 달리는 코스는 시간마다, 계절에 따라 늘 변했다. 가입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고구려 마라톤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다. 모두가 뛰러 나가고 짐을 지키고 있다가 책을 보는 사이 감독이 들어왔다.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뛴 것인지.
달리기를 시작하고 3개월로 접어들 때 서울 하프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아침 일찍 광화문으로 나갔다. 모두가 낯선 풍경이었다. 달리기 위해 지하철로 이동하는 마라토너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맡기고, 체온을 유지하는, 배번을 옷에 다는, 준비 운동을 하는, 단체 사진을 찍고 서로 격려하고 완주를 바라는, 출발선에 서서 힘찬 함성과 출발하는 모든 일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요동치며 이루어진다. 처음으로 하프코스를 달릴 때는 무사히 완주하도록 페이스 메이커로 감독이 고생했다. 처음으로 하프를 달린 일은 모두 감독의 도움이었다.
바로 2주 뒤에 과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과천을 한 바퀴 돌아 문원동 집 앞을 통과해 관문체육공원을 지나 양재천 영동1교 바로 전까지 왕복하는 주로였다. 뜨거운 열기는 바닥에서 올라오고, 지루했다. 여름이 되어 남산 언덕길 전지훈련이 몇 번 있었다. 남산 케이블카 아래 산책로를 6번 왕복하여 총 18Km를 달리는 훈련이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오르막 내리막이 연속인 주로는 상쾌했다. 여름엔 아침 일찍 정기모임에서 달리고, 7월과 8월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서울대공원 동물병원 앞 비탈길에서 언덕 달리기 연습을 하였다. 무더운 날일수록 땀을 흠뻑 흘리고 함께 먹는 수박 맛은 일품이었다.
언덕 훈련 종료를 기념하고, 우리가 뛴 곳에 예의를 표하는 마지막 파티를 과천 마라톤팀과 함께 했다. 어디 다른 데 가서 헤메지 말고 과천으로 와서 뛰라는 말을 웃어넘기기도 했다. 어느덧 가을의 한 가운데 있었다. 이제 생애 처음으로 풀코스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막연히 두렵고 마음속엔 아주 큰 공포감이 일었다. 42,195미터, 42.195km를 달리는 일은 어떤 느낌인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중간에 아무 주저함 없이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백제 공주 마라톤에서 처음 완주는 훌륭한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준 그 여자와 함께 잘 달렸다. 짧고 스쳐 지나가서 아름다웠다. 내 생애 첫 마라톤 풀코스의 기억은 그렇게 남았다.
마라톤 메이저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2017 춘천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을 보다니. 삶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내가 여기서 뛰고 있다니. 온통 놀라움으로 가득 찬 날이었다. 대개 기쁨과 행복이 크면 바로 이어서 아프고 참기 힘든 고통이 온다고 했다. 난 상관 없었다. 삶이 이대로 끝나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거의 선수급인 누님의 페이스 메이커에 기대어 잘 달렸다. 기록 단축은 의미가 없다. 이제 시작한 초보자가 달리면 짧아지는 기록, 달리면 빠른 속도, 달리면 더욱 먼 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언제까지 달리느냐 어디를 향해 달리느냐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겨울이 왔다. 올해의 마지막 장거리 마라톤인 시즌 마감 하프마라톤에 참가했다. 사정없이 칼바람이 부는 한강 변을 뛰었다. 잠실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암사대교를 지나 고덕천교 근방을 돌아오는 거리였다. 달리면서 완주 시간을 헬륨 풍선에 적어 다른 마라토너들이 보며 뛰게 유도하는 페이스 메이커들을 보았다. 여러 페이스 메이커들을 뒤로하고 달리면서 얼핏 웃음이 났다. 와~ 처음 달릴 때 내가 저렇게 늦게 달린 거야? 아~ 내가 풀코스 완주할 때 한참 뒤에서 쫒아가던 5시간이시네. 4시간 페이스 메이커를 앞서면서는 이렇게 끝까지 가면 서브포가 되는 건가? 하면서 달렸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앞에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를 쓰지 않고선 말할 수 없는 분들을 이제는 웃으면서 보고 지나치다니 얼마나 달렸다고 말이냐.
처음 달릴 때 무릎이 아파서 고생했다. 언제 한번 감독과 함께 속도를 내고 난 후엔 족저 근막염이 생겼는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아파 고생했다. 그럴 때마다 달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쉬었다. 그리고 안 아프게 되면 다시 달렸다. 부상에 예민하고 자주 물어본 이유가 있었다. 좀 더 오래 달리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그랬다. 지금도 후련하게 달리고, 달성할 목표가 있다면 죽도록 달려 이루고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가 잘못 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반복의 연속이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낳아지는 모습이 삶을 아름답게 한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나름대로 속도를 높여 달릴 때도 있지만 달리는 시간을 길게 해서 오래 달린 후에는 그 좋은 기분이 며칠 동안 더 오래 간다. 길 옆의 강물을 바라보고, 구름과 많은 풀들과 꽃을 생각한다. 소박하고 아담한 구불구불한 공백 속을, 지루하면서도 정겨운 침묵속을 그저 계속 달린다. 이런 일은 누가 무어라해도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2017년이 갔다. 정말 스쳐 지나갔다. 모든 아름다운 날들이 지나갔다. 너무 아름다워서 한 순간도 그냥 보내기가 힘들었다. 눈길을 아무리 줘도 부족했다. 2018년은 또 어떻게 달릴지 모른다. 얼마나 달릴지 나는 모른다. 위의 모든 이유가 나를 달리게 한다. 적어도 내가 달리는 전 구간을 걷지만은 않겠다. -見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