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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ptember Sky Sep 27. 2018

우리의 시간이 멈출지라도

서로의 시간

만나고, 달리고, 차마시고, 책을 공유하고, 배우고 있다

가끔 얼굴 좀 보고 살자는 남자의 말에 토를 달고, 미루기 바빴다.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바쁜 거 정리되면, 이번 일만 끝나면 보자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별것도 아닌 일이 갑자기 의미가 산더미처럼 커져 정말 바쁜 사람인 것처럼 어깨가 으쓱거리기도 하였다. 


'하, 어쩌니.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니?' 불쑥불쑥 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다. 아니면 내가 사는 모습들을 합리화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생일 때는 직장인이나 학교 선배들에게 일어나는 모습들이 근사해 보였다. 쉬는 날이나 저녁 시간을 열심히 맞춰야만 겨우 얼굴 한 번 볼 수 있고, 또 그런 자리 나가보면 너무나 기뻐하는 선배들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게 꽤 멋있게 보였다.


유리 천정을 이고 사는 나는 내려놓을 수 없는, No 라고 말하면 견딜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잘근잘근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어느 것 하나라도 고장 나면 모두 서버릴 것 같은 아찔한 줄에 매달려 있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도 비우지를 못한다. 그 남자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자주 하지 않는 그 남자의 투정 섞인 전화가 한동안 오지 않는다. 그는 어디쯤 헤메고 있을까?


어쩐 일이니? 전화를 다 하고. 진짜 방학이니? 그 여자에게 쓸데없이 물어봤다. 술 마실까? 판교에서 막히는거 감안하면 한 시간 정도 걸려. 집에 들렀다 차 놓고 총알같이 갈께. 소소하게 퇴근길에 가볍게 한잔하고, 가끔 들르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는 일상이 자주 오진 않는다. 일상에서 기분이 좋은 시간은 아침에 출근 시간이다. 녹색으로 물든 산길 가운데로 난 도로를 타고 가는 길은 모든 날이 좋다. 늘 어둠이 내린 시간에 퇴근하니 녹색도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간혹 일찍 퇴근하는 날, 특히 해가 길어진 여름날은 연두색에서, 진한 초록색으로, 그리고 검은색으로 변하는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다. 


그 여자를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기고 살아왔다. 가끔은 그리운 사람으로 만족했다. 나도 존재하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나기 전에는 세속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맞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런 일상이 나에게 어울렸다. 그런 옷을 입고 살아왔다.  그런데 갑작스레 새로운 세상을 알아버렸다. 나에게 주어진 더 놀라운 일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난 더 배우기로 했다. 더 연습하기로 했다.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나를 위해 남겨진 운명같은 것이 있다면 난 보고 싶었다. 필연적으로 나이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안되는, 반드시 나만을 위해 지금까지 남겨진 우연을 만나려 한다. 그 여자는 늘 참는다고 한다. 무엇이든 우직하게 잘 견뎌내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지금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이전에 산 꽃이 시들어 버린 이후로 비어 있던 꽃병이 생각났다. 시내 제일상가 예림꽃집에서 장미꽃을 열 송이 샀다. 꽃들은 물 밖에 나오는 순간 맨 아래 물관이 마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반드시 물 밖에 한 번이라도 나왔던 꽃은 밖에 있던 시간에 상관없이 다시 물병에 꽂기 전에 최소 1~2cm 밑동을 자르고 물병에 꽃으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같이 더운 날씨에는 3일마다 물을 갈아주고, 얼음을 3~5개 같이 넣어서 약간 찬물을 만들어 주면 좋다고 했다. 


물을 갈아주고 얼음을 6개 넣고 말했다. 고맙지? 응, 고맙지? 고마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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