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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ptember Sky Dec 08. 2021

원하지 않았던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성자 선배

이야기되지 않는 일은 모두 잊힌다.

성자 선배를 20개월 15일이 지나서야 만났다. 


잉크 한 방울이 수조에 든 물 전체를 물들이고, 물은 쏟아지고, 유리컵은 깨지고, 고요한 곳은 곧 소란스러워진다. 무질서는 시간이 갈수록 증가한다. 증가한 무질서는 절대로 다시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다. 법칙이다. 마치 열은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데로 이동하고 반대로는 이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가는 게 아니라 무질서도나 활성도라고 부르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이 자연이 앞으로 나가는 방향이다. 적어도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어야 하고, 한 순간도 주저함이 있어선 안 된다.


대부분 사람은 두 가지 삶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미처 살아보지 못했던 삶이다. 우리가 삶은 한 번 살고,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두 번째 삶을 살게 된다. 선배는 이 두 가지 삶을 다 살고 있다. 11월 13일 퇴원했으니 정확히 20개월 15일 동안 병원에 있었고, 재활치료를 받고 있으며 더 이상 병원에 있는 게 의미가 없어 집으로 오게 되었다. 작년 3월 28일 늦은 밤 경추를 다쳐 입원한 이후로 선배는 살아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왔다. 남자는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쓰는 두 번째 삶을.


지나고 보니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한 것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소중한 것이 있다가도 없고, 가치 없는 것도 없고, 지켜야 할 것도 없고, 지키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무릇 인간에게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없는 것이라는 것을 현대의 뇌과학이 밝혔다. 생각이나 마음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는 것을 잘하는 게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생존을 위해 뇌가 일부러 만들고 상상하고 지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야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하고, 굶고, 인내하고, 성취하고, 기다리는 모든 일을 결국은 왜 하는 것일까?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되도록 오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으로 관념을 만들고, 어떤 의미를 만드는 자체가 다 허구라는 의미다. 굉장한 발견이다. 사실 지난 일을 예측하여 생존에 유리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전부인 뇌는 본연의 목적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인류에게 전해 내려온 모든 것은 당시의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생존을 위해 대단하지도 않은 보통의 인간이 만들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선배를 모시고 양재천을 함께 달리고 어울렸던 사람들과 만나기로 했다. 아직도 재활 치료 중이라서 거동이 불편한 선배 집으로 모시러 갔다. 양재동 빌라 3층으로 올라갔다. 일주일 전에 퇴원하면서 가져온 짐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거실이 짐으로 가득하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오른쪽 벽에 걸려있는 달력은 2000년 3월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누구도 달력을 넘기지 않기로 약속이나 한 듯 2000년 3월 28일에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달력은 20개월이 지나도록 넘어가지 않은 채 달려 있었다. 뜨거운 기운이 눈으로 올라오지만 지금은 아무런 기색 없이 로봇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휠체어를 먼저 가져다 싣고, 형수님과 함께 부축해 1층까지  내려왔다. 형수님은 몸집도 작고 머리를 짧게 기르시는 분인데 머리는 허옇고 아주 긴 생머리가 되도록 형님을 혼자 보살폈다. 20개월 동안 한 번도 밖에 나오신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형수님의 당부를 듣고 우리가 자주 가는 역삼역 중식당으로 한참을 걸려 모시고 왔다. 몇 시간 후에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기로 했다. 형수님은 우리가 밉기도 하겠지만 형님이 좋아하시니 마지못해 첫 외출을 허락했다.


모두 걱정을 많이 했다. 워낙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침묵과 미소만이 형님 입이 하는 일 전부였다. 가끔은 노래도 하지만. 말수는 적어도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굳이 다가가진 않았지만 오는 사람을 마다하진 않았다. 형님이 자리에 앉고 조금은 숙연한 분위기를 형님은 맑고 다정한 목소리로 참석한 사람들을 들뜨게 만드신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다. 늘 주변을 밝고 환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시간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잘들 지냈냐? 양재천 사람들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만나려고 치료도 잘 받고, 운동 많이 했어.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반갑다." 선배의 표정은 환했고 맑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반가워요. 형님."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거짓말 같은 게 삶이다. 조금도 예측할 수 없다.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게 인생이다. 굳이 억지로 맞추려고 하면 오히려 어긋나는 게 우리가 사는 삶이다. 흐르는 것들은 흐르고, 부딪히는 것들은 부딪힌다.


선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선배가 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인가 지나서 호자를 만났는데 선배 몸무게가 15킬로나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선배의 이야기들 듣고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신적인 고통이나 속상한 것들은 몸을 야위게 만든다. 선배의 외모는 예전 모습과 비슷했다. 표시 나는 점은 몸이 불편한 것 빼고는 없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나 생각도 또렷하고, 함께 있을 때 즐거운 것들을 잊지 않았고, 반짝이는 눈빛, 늘 지녔던 유머러스한 말까지 무엇하나 다른 점이 없었다. 마비된 근육이 경직되고, 관절이 굳어 버리고, 순간순간 느껴지는 통증을 빼면 예전과 똑같았다. 같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이미 몸이 부자유스러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 생각이 비슷한 게 남자도 '혹시나 형님 식사를 떠먹여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순자 누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한 번은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


술은 마시지 않기로 해서 시키지 않는다. 필자, 미자 선배가 특별히 준비한 음식이 나오자 형님이 가까스로 일어서시고 옆에 앉은 현자와 순자가 의자를 앞으로 약간 앞으로 당기고 다시 힘겹게 앉는다. 팔은 편하게 움직이는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아 급히 두툼하게 만들어 온 포크를 손에 쥐어드렸다. 연달아 들어오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앞에 놓아드렸다. 포크로 찍기도 하고 뜨기도 하면서 잘 드신다. 수 백 개의 우연이 한 군데로 모아져 만들어 내는 필연적인 일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분석하고 이유를 찾는 것은 나중에 해야 하고 우선은 대처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선배는 우리가 궁금한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말해주었다.


"봉자하고 순자가 가고 나서 술도 많이 안 마셨어. 화장실을 갔는데 알지? 식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뒤에 계단 세 개 있는 화장실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딘 거야. 넘어졌는데 경추가 다친 거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신음소리를 듣고 약간 떨어진 골목길을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신고해서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고..."


남자는 정확하게 안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갔었고, 무엇보다 우리가 항상 갔던 식당이라서 왜 구조가 바뀌었고, 가게가 나뉘었고, 화장실이 생긴 것부터 자세히 알고 있었다. 사실 아무런 연관성도 없지만 원래 일이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무엇하나 엮인 것도 없는데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원래 앞뒤가 맞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 지금도 그때 그렇게 일찍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어느 것 하나도 다음 날 아침이 올 때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거라고 믿는 방식이 어쩌면 교만한 게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왕이면 더 배려하고 신경 쓰고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와서 처음에 대처를 잘못했나 봐. 가족들이 오고 이야기도 나누고 아침까지 멀쩡하게 있었는데,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라고 하면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야. 그때서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MRI 찍고, 신경 검사받고 경추 골절을 확인하고 곧바로 수술했지. 이미 좀 늦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의사들은 살아 있고 이 정도 회복한 것도 기적이라는데. 기적은 무슨... 그때 더 빨리 대처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 거고, 만약 더 늦어졌다면 너희들도 못 만나겠지. 수술을 잘했는지, 정말 필요했던 건지 그런 거는 아직 몰라, 다 그런 거 아니니?" 


"병원에 있는 처음 6개월 동안은 매일 밤마다 와이프가 옆에 있는데도 엉엉 울었다. 죽고 싶었고, 너무 아팠거든.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어서 죽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어. 내가 있던 병동이 원래 그런데야. 막 죽여달라고 소리치고 싸우고 통곡하는 사람들만 있는 병동이야. 우울증은 기본이고, 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야. 지옥이 차라리 더 좋은 곳 아닐까? 지옥에서는 고통스럽지만 일은 하고, 잠깐 쉬기도 하고 말이지. 물리치료도 하고 훈련도 하면서 우울증 치료도 받는 곳이야. 나도 처음엔 받았지만 정신과 치료는 금방 끝났어. "


순자 선배가 "어제만 해도 팔딱이던 사람이 오늘 온몸이 마비되어 침대에서 지낸다고 생각해 봐. 이거 버틸 수 있겠어?" 하고 말한다. 웃음이 났다. 팔딱이라니, 우리가 물고기도 아니고. 똑같은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더라도 다른 삶을 산 것이다. 아무리 겪어본 경험이 비슷하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이해하고, 겪는 고통과 생각이 다르기에 같은 삶이란 자연처럼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말과 행동조차도 각기 사람은 다른 경로로 다른 이해를 하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이치다. 하물며 우리가 형님의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6개월 지나고 나니 양재천 사람들 보고 싶었고, 내 힘으로 죽고 싶었고 반드시 걸어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어. 하루 3번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계속 운동했어. 계속 걷고, 계속 치료받고, 또 운동하고, 물리치료받고, 또 운동하고... 신경 분야는 아직도 가장 모르는 분야야. 다치기 전처럼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거고, 처음 다쳤을 때는 다리 쪽에 통증이 심해지더니 점점 허리, 팔, 손으로 옮겨와, 아직도 손에는 따뜻하거나 찬 것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온도가 통증으로 전해져. 뜨겁거나 차가우면 아픈 거지. 낮에는 지낼만한데 밤에는 더 예민한지 고통도 심하고, 근육 경직이 자주 일어나고 밤이 무서워지지."


"경직은 달리다 보면 쥐 나는 것과 비슷해. 근육이 경직되고 말리면서 아픈 거지. 관절이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굳을 때마다 펴 줘야 하거든, 계속 움직여야 해서 계속 움직였어. 한 시간마다 근육을 강제로 펴고 걷고, 자고 나면 더 심해서 아침에는 더 힘들어도 경직되고 통증이 심한 근육들을 더 많이 움직이고..."


"너희들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매일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의사는 조심하라 그러고, 간호사는 무섭게도 훈련한다고 하더라. 정말 다시 달리고 싶어서 나한테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어. 여하튼 정말 열심히 했어. 힘도 없고 자연스럽지 않은데 짧은 거리를 천천히 걸어, 혼자 먹을 수 있고, 아직 손가락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형님은 다치기 전과 다름없이 이야기하고, 웃고, 미소를 지었다. 말씀도 잘하셨고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씀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많이 불편한 것 빼고는 20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는 모든 게 순식간이지만 말이다. 


멘털이 강하다는 말은 정신력이나 마음의 중심을 잘 잡는다는 말이다. 성자 선배 멘털이 강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멘털이 아니라 육체의 힘이 강한 거다. 마음이나 정신은 허약하고 깨지기 쉽고 절대 육체를 넘어설 수 없다. 우리가 믿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것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자 선배는 자기 연민하고는 거리가 멀고 다른 사람 칭찬을 잘한다. 직원이 30명 되는 건실한 건축, 전기 플랜트 설계 회사를 이끌어 갈 정도로 유능하고 다른 사람에게 늘 감사하는 분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룬 것들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달리면서 나에게도 늘 그렇게 대했다. 애써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려고 애쓴 적도 없고, 맹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사업이든 사람 관계든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다. 국악고 앞에 근린공원 근처 선배 회사에 우르르 몰려가 양주에 새우깡을 마실 때도 그랬고,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다가 오줌으로 핏물을 한 바가지를 쏟아도 계속 달리는 사람이었다.


다음 주가 환갑인데 2년 전에 딸 둘을 시집보내면서 많이 허전하고 외로운 모습을 보았다. 형님은 자신의 즐거움이나 행복을 다른 데 의지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가족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나? 오로지 스스로 가진 것과 이루는 것들, 달리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지키려고 한 걸까? 다 가졌다고 안심하면 무엇인가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놓아 버린 건가? 성자 선배는 원래 충고나 조언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아쉬운 시간이 금방 지나고 선배를 보낼 시간이 되었다. 선배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나왔다. 꼭 지켜 주겠다고 말은 했다. 사실 선배나 우리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우리가 달리던 주로에 나와 함께 노는 것까지만 이룰 수 있다면, 세 번째 삶을 다시 또 살아갈 수 있다면 하고 바랐다.


5단지 길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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