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소녀가 사랑한 것들 09 | 몽연
단어 줍기
지난번 에피소드에서 어른이 되는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내가 생각하는 어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는 어른을 동경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경험이 필요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는 중이다.
얼마 전,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나태주 시인의 딸, 국어국문학과 박사, 나민애 박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어휘력은 굉장히 중요하며 우리는 모두 단어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어휘력의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전을 보고 공부를 해도 모르는 단어는 어딘가에서 또 나오기 마련이다.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그 단어를 나의 단어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넘기지 말고 그 의미를 찾아보고 기억해 두는 것. 얼마 전에 ‘면억’이라는 몰랐던 단어를 발견했다. 나는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사전을 찾아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고 그 단어를 이용해 예문을 만들거나, 소설 속에 써보거나, 시에 넣어본다. 단어장처럼 메모장에 적어두기도 하며 단어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상기시킨다.
이렇게 그냥 지나간다면 아무리 열심히 암기해도 단어를 자연스럽게 활용하기엔 힘들다. 실제로 익숙하게 사용하는 단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일을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단어장에 적힌 단어들을 다시 복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우리말 단어를 외운다고 생각해 보자. (나 같은 경우엔 우리말 단어를 외우는 일이 좀 더 즐겁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단어를 줍다 보면 어느새 확장되어 있는 자신의 어휘력을 마주할 수 있다.
감정 섞기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여기서부턴 영화 스포가 있으니 주의하길 바란다.
영화 속에서 기쁨이가 그런 말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기쁨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고. 실제로 시즌1에서 주인공이자 리더 역할을 하던 기쁨이를 제치고 시즌 2에선 불안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춘기가 온 것이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감정 캐릭터들이 콘솔을 조절하며 라일리를 컨트롤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라일리가 기쁨이를 부른다. 감정에 이끌려 다니는 것을 벗어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연출이 너무 좋아서 기억에 남았다. 어른이 되는 과정을 본 것 같았다.
나는 조울증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곧 말과 행동과 밀접한 관계라서 잘못하면 상대방에게 무례한 말을 하거나 눈치 없는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더 최악인 점은 그렇게 한 말과 행동이 어디가 잘못된 건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대비하기 위해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 쉽지 감정에 이끌려 가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억제한다기보다는 감정을 섞으려고 노력한다. 마치 물감놀이를 하듯이 감정을 섞는 것이다. 감정을 가두고 누르고 참으려고 노력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감정을 조절하라는 말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기우는 감정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고 예쁘게 가꾸자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나는 너무 화가 날 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너무 에너지가 넘칠 땐 차분해지는 음악을 듣는다. 조금 무기력해질 때면 연습실에 가 춤을 추기도 하고 우울이 가득 차오르는 날이면 글을 쓰면서 내 감정들을 정리한다.
이렇게 치우친 반대 편의 감정을 끌고 와 잘 섞다 보면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로운 색깔이 나오게 된다. 신비한 색깔들을 마음속 깊이 저장해 두었다가 이다음에 감정이 치우쳐지면 다시 들고 와 감정을 또 섞는 것이다. 그렇게 나만의 색이 점점 쌓여 아름다운 작품이 되면 밀려오는 뿌듯함에 잠식되는 날이 올 것이다.
천천히 걸어가기
어른이 되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노력하는 건 혼자가 되어도 외로워하지 않는 것이다. 외로움이 싫은 나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어른이라는 타이틀이 다가오는 중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왠지 혼자가 된다는 것 같다. 스스로 일어나서 스스로 밥을 챙겨 먹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스스로 병원에 갈 줄도 알아야 하며 스스로 내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이런 게 얼마나 어려운지 조금 일찍 사회에 나온 나는 조금 일찍 알게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출퇴근 시간이 겹칠 때가 있다. 다들 어딘가 바쁘게 가기도, 지친 모습을 하고 돌아가기도 하는 지하철에 앉아있다 보면(사실 서 있을 때가 더 많다.) 세상 사람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데 나 혼자만 여유롭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심지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친구들 보다도 뒤처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알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어른 같지 않다는 생각에 자퇴를 하고도 우울한 날이 많았다.
18살이 왜 어른스러워야 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자퇴를 하고 사회에 나온 순간부터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하고, 그 길이 매우 험난하다는 걸 알아서, 시간이 오래 걸리면 어쩌지 걱정하고, 하루빨리 멋있는 어른이 되어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대학을 가는 순간, 20살이 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는 자퇴를 하는 순간 시작했으니까 20살이 되는 해에 이미 완벽한 사람이 되어있어야 하고, 그래서 지금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부담이 가득했다. 단지 자퇴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청난 부담이 나에게 몰려온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남들보다 이른 출발을 했을 뿐이지 도착 지점이, 도착하는 시간이 같을 필요는 없다는 걸. 게다가 어른이 되는 일은 무지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이라서 다급하게 어른이 된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18살처럼 굴어도, 어쩔 때는 어리광도 좀 부려도 된다는 걸 알았다. 허겁지겁 어른의 모습을 따라 하기보다 내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멋진 어른이 되어 있겠지 생각한다.
먼 훗날 어른이 되어 있을 나를 상상하며, 오늘도 멋진 어른을 닮기 위해 나는 천천히 나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