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짜게 군 남자를 욕한다
그가 돌아간 뒤에도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정말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건가? 침대는 어째야 하는 건가? 오래 된 침대였으니 쉽게 부러졌겠지... 그냥 내가 사야 하나? 그래도 그 사람이 갑자기 앉지 않았다면 침대는 멀쩡했을 거야. 그가 망가뜨렸으니, 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왔다갔다 했지만 점점 그가 침대는 사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나를 정말 좋아했다면, 그리고 그 동안 만났던 정을 생각한다면 사주겠지’ 싶은 기대를 안고, 다음날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제 밤에 우리집에 왔었던 거 기억나?”
“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니, 왜?”
“어제 좀 울길래…”
“내가?”
“응.”
“내가 어제는 많이 취했었나 보다…”
“별일 없으면 다행이고... 그런데 내 침대 망가진 건 거억 나?”
“응? 침대가 왜?”
“오빠가 내 침대에 앉을 때 프레임이 부러졌어.”
“…”
“그래서 말인데 오빠가 침대를 사주면 좋겠는데...”
“…”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갑자기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부러뜨린 게 맞아? 침대가 그렇게 쉽게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지금 오빠가 망가뜨리지도 않은 걸 망가뜨렸다고 한다는 거야?”
“그건 모르겠고, 침대가 갑자기 나 때문에 망가졌다는 게 말이 돼?”
“그 거야 오빠가 무거우니깐 앉는 순간 침대가 못 버티고 내려앉았겠지!”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여하튼 난 몰라!”라며 짜증을 내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이없고 치사했다. 그리고 ‘나랑 사귀고도 그렇게 나를 모르나?’ 싶었다. ‘내가 거짓말을 할 사람도, 공짜 물건을 바라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말이다. 사귀는 동안 선물 하나 사달라고 한 적 없구만…
그깟 침대 하나 가지고…
다음날까지 나의 화는 누그러지기는 커녕 점점
부풀어 올랐다. 나는 급기야 쇼핑몰에서 내 침대와 비슷한 침대를 찾아 캡처를 한 뒤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내 침대와 비슷한 가격대의 침대야‘라고
메시지를 덧붙였다. 그랬더니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다.
‘네 침대니깐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다시는 자기한테 연락하지 말라니… 연락은 맨날 본인이 하면서! 침대 사건 아니었으면 내가 연락할 일도
없었는데... 그래도 저렴한 30만원대로 찾았는데… 술값은 맨날 몇 십 만원씩 턱턱 내면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아 정말 치사하다. 멀쩡한 침대를 망가뜨려 놓고 왜 안 사주는데!’라고 문자를 쓰다 지웠다. 내가 너무 구질구질하고 구차하게 느껴졌다. ‘그래 잊자!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본인도 연락을 안 하겠지. 자기도 쪽 팔릴 거야.’ 그리고 그와 다시 침대 때문에 엮이느니 깔끔하게 잊고 ‘새 남자’를 찾아 나서자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치사한 밑바닥을 보고도 우린 한 번 더 만나고 헤어졌다. 세 번째 다시 만날 때는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다. 나보고 ‘미친년!’이라고 할 게 물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내가 ‘미친년’ 같았는데, 그래도 또 다시 만난 걸 후회하진 않는다. 세 번째 이별 후에야 나는 정말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별 후 몇 년 동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술에 취해 전화를 했지만, 나는 귀찮을 뿐 아무 감정이 들지 없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가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전에는 화가 나면서도 ‘혹시 아직도 나를 못 잊는 건가’ 싶은 착각과 함께 신경 쓰였다. 신경 쓰인다는 건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고, 증오도 사랑과 함께 애정의 양가감정이다. 아무 감정이 없을 때가 진짜 이별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누군가 나에게 재회에 대한 연애상담을 해올 때면 결혼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다시 만나보라고 한다. 그리고 끝까지 한 번 가보라고… 다시 만날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이 있으면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도 제대로 시작하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 만났을 때 침대는 사줬냐고? 침대를 사줬다면 이 글은 안 쓰지 않았을까. 하하.
내 인생 드라마 중 하나인 <또 오해영>에는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여자는 떠난 남자 욕하지 않아요. 자기한테 짜게 군 남자를 욕하지. 짜게 굴지 마요, 누구한테도.”
나는 친구들에게 그를 ‘망나니 B’라고 칭하고, 친구들은 다음과 같이 나를 위로해준다.
“백 번 생각해도 그 놈하고는 잘 헤어졌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간혹 생각이 질척거린다.
‘침대 값은 받아내고 헤어졌어야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