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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시감 Oct 20. 2023

오빠 A형 아니었어?

혈액형 궁합

나이 마흔 넘어서 총 3번의 연애를 했다. 3번의 연애가 남긴 교훈은, ‘B형에 술 좋아하는 사람은 만나면 안 된다’였다. 난 분명 다른 세 사람을 만났다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놈이 그 놈이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하하. 


사람마다 끌리는 이성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끌린다. 나는 어렸을 때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주로 사귀었는데, 마흔이 넘어서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다. A형에 생각이 많고 연애에 신중한 나와 달리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력이 빠르며 리드를 잘 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로 너무 생각이 많고 신중해서 그런지 시작도 못하고 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반면 세 사람과의 연애는 시작이 쉬웠다. 한 두 번 만나고도 호감을 표시했고, 내가 긍정의 시그널만 살짝 보내도 바로 ‘Go!’라고 해야 할까. 신중은 커녕 생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몇 번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사귀는 사이가 돼 있더라. 


그리고 세 사람과 헤어지고 발견한 공통점이 바로 ‘구속 받는 거 싫어하는 B형에 술을 자주 취할 때까지 마신다’였다. 여기서 ‘자주’는 1주일에 4~5번이다. 그리고 나는 만날 때마다 술을 같이 마셔야 했고, 다른 사람과의 술약속으로 순위에서 밀려나기 일쑤였다. 

<B형 남자친구>라는 영화가 있다. 2005년에 개봉한 이동건, 한지혜 주연의 영화로 B형 남자와 A형 여자의 연애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혈액형 궁합에서 일반적으로 ‘A형 여자가 B형 남자를 만나면 고생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영화를 보면 딱 그렇다. 싫은 소리를 잘 못하고 배려심이 많은 A형 여자가, 솔직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이 있지만 자기 중심적인 B형 남자를 만나 힘들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 에피소드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중에 B형 남자친구가 한약처럼 생긴 팩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 모습을 본 A형 여자가 어디가 아픈지 걱정하자 남자는 건강을 위해 마시는 ‘와인팩’이라는 말을 한다. “건강에 좋다”는 말에 여자가 자신도 하나만 달라고 하자 남자는 “내 것밖에 없는데!”라며 마지막 남은 한 모금도 쪽 빨아먹는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두 번째 만난 B형 오빠가 나를 데리러 집 앞에 왔던 때 일이다. 그는 내가 사는 건물 1층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 어디서 났어?” 

“어, 여기 1층 카페에서 샀는데…”

“내 거는?”

“내 것 밖에 안 샀는데…”


속으로 ‘음… 본인 커피 살 때 전화로 “너도 마시겠냐?”고 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B형 남자는 역시 배려심이 좀 부족한 건가’라는 편견이 이어졌다. 


물론 모든 B형 남자들이 생각이 짧고 배려심이 부족한 건 아니다. 어떻게 세상 사람 모두를 4개의 혈액형으로만 분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편견은 축적된 경험에 따라 작동한다. 나의 축적된 경험은, 불행히도 B형 남자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만들었고, 이 편견이 부조리한 인식이라고 해도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넘치는 B형 남자와 연애하기 전에는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 


두 명의 B형 남자와 이별 후 나는 남자를 만날 때 혈액형을 따지기 시작했다. 마흔 넘어 혈액형을 따지고 있자니 좀 우스웠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B형 남자를 만나 다시 마음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MBTI를 따지지 혈액형은 묻지도 않는다는데… 혈액형을 따지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나이에 맞게 따진 건지도 모르겠다. 하하.  


세 번째 만난 사람은 A형이라고 굳게 믿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일 때문에 두 세 달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하는 교포였다. 우린 주로 카톡이나 보이스톡으로 매일 대화를 나눴는데, 몇 시에 전화하겠다는 사소한 약속도 잘 지켰다. 그를 아는 주변인들의 평판도 ‘착하다’는 의견이 많았고, 그 동안 만났던 두 사람과는 성향이 달라 A형일 거라 추측했다. 

게다가 그는 대중적으로 좀 알려진 사람이라 언론 인터뷰가 꽤 나왔는데, 어느 인터뷰에서 혈액형이 A형이라고 돼 있어 확신까지 하게 됐다. ‘그래 역시 A형이라 착했던 거였어!’라는 확신에 쐐기를 박을 겸 그가 한국에 왔을 때 혈액형에 대해 물었다.  


“오빠는 혈액형이 뭐야?”

“왜? 미국에서는 혈액형 같은 거 안 따져.”

“응 그냥 궁금해서…”

“나 B형.” 


뭐시라… B형이라고? A형이 아니고? 차마 나는 ‘내가 오빠 인터뷰를 죄다 찾아 읽었는데 A형이라고 나오던데?’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젠장…. 왜 하필 또 B형이람!’라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누가 한창 마음이 오가는 연애 초기에 혈액형 운운하며 헤어지겠는가. ‘근데 뭐 어때! A형처럼 착한데… 내가 B형 남자에 대해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걸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B형이라는 걸 알고부터는 점점 B형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님 내가 나이 들어서 콩꺼풀이 금세 벗겨진 걸까.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였다. 


한국에 와서 만나기로 한 날, 약속장소에 가보니 그는 모르는 사람과 같이 앉아 있었다. 어 이상하다. 이 상황 왠지 익숙한데… 첫 번째 만났던 B형 오빠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그는 혼자 있다며 술자리에 나를 자주 불렀는데, 가보면 꼭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 그리곤 ‘내가 좋아하는 형님’ 아니면 ‘내 친구, 아까는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나는 ‘착한 여자친구’ 노릇 하느라 불편한 기색은 드러내지도 못하고 잠시라도 앉아있다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이 불편하다 얘기해도 그때는 ‘알았어”라고 대답하곤 머리가 리셋되는지 같은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됐었다. 

그 날도 ‘내가 좋아하는 형님’이라고 소개한 분이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웠을 때, 내가 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미리 얘기를 하지!”

“그래서 싫어?” 

“싫다는 게 아니라 미리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여자들은 왜 그렇게 복잡해?”


음... 이게 왜 여자들의 문제로 넘어가는 걸까? 그리고 여자들이, 내가 정말 복잡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리 얘기도 안 하고 다른 사람을 부른 것이 매너가 없는 행동 같았다. 이후로 이런 사소한 문제가 반복되고, 미국과 한국이라는 물리적 거리와 시차 그리고 이어진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별하게 됐다. 


이렇게 3번의 연애 후 나는 단순한 호감만으로 사람을 쉽게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한때 ‘B형 남자와는 엮이지도 말아야지’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혈액형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과 성향을 더 신중하게 보려고 한다. 지나고 보니 내가 만난 남자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선택한 내가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좋은 사람은 나랑 잘 맞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조차 모르고 얕은 호감만으로도 무턱대고 사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누군가 호감 가는 사람이 생기면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시간을 더 갖고 신중하게 관찰한 다음 만나자 싶었다. 그래서 그런가. 난 마지막 이별 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애를 못하고 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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