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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혁 Oct 11. 2017

[성경] 룻기서 2장

불확실한 시대에 기독교인으로 살아남기

[룻기서 2]

 두 과부가 귀환을 했다. 며느리는 외국인이고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섬기던 자였다. 이러한 모압 족속을 이스라엘 민족들이 싫어했을 것이다. 저 천한 것들이라고 비방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유력한 가문의 집안이 모압으로 이사를 갔는데 모두가 다 죽고 외국인과 같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면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꼴좋다.’라고 뒷다마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때 누굴 만나냐면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을 만난다. 이 사람이 기업 무를 자라고 한다. 이 제도를 보면 기업 무를 자는 남자이다. 그런데 가족 중에 남자가 없으면 어려움을 당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친척 가까운 사람 중에 형제가 다 죽어 대가 끊기게 되면 대신 대를 이을 수 있게 해 주고 재산상속도 해줘야 한다. 이 제도는 부담스러운 제도이다.      

(신 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우연히 그리고 마침 이어진 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섭리의 대다수는 우연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주관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 보면 보아스의 성품도 나온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사를 할 때 그냥 ‘샬롬’이라고 한다. 이 샬롬은 ‘평안을 빕니다.’라는 뜻으로 이것이 보편적 인사이다. 그런데 보아스는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인사한다. 그에 다른 이들의 답변도 ‘여호와가 당신에게 복주 기를 원한다.’라고 말한다. 습관적으로 샬롬 샬롬 하고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서 인사한다.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연히 이 보아스는 룻을 만나게 된다.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이 여인과 보아스처럼 ‘당신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남자와 만난다. 이 대단한 두 사람의 만남이 예수를 잇는 계보가 나오게 된다.      

 성경은 이 우연과 마침 시리즈가 많이 나온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하고 그때 조카 롯이 있는 소돔 땅을 멸하겠다고 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딜을 한다. 그 후에고 롯은 그때 마침 소돔 땅 입구에서 두 천사를 만나고 그리고 죽지 않고 살게 된다. 우연한 기회가 구원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계기가 되어서 구원이 이를 수도 있다.     

 사무엘상에 보면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갔다가 그때 마침 골리앗과의 전쟁이 있었고 다윗이 분노를 하게 된다. 다윗이 그 자리에 항상 있는 자리가 아니고 우연히 갔는데 그때 마침 골리앗이 나타났고 이 모욕을 우연히 다윗이 듣고 의분에 차게 되고 골리앗을 죽이게 되고 그게 계기가 되어 사울 왕의 눈에 띄고 이스라엘 왕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 되는 계기이다. 그것이 아니었으면 초야에 묻혀있는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인데 우연한 자리를 만드시는 것도 하나님의 기획이다. 이 우연이 이스라엘 왕이 되는 역사가 된다.     

 마가복음에 보면 루포의 아버지인 시몬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실 때 마침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간다. 그는 얼떨껄에 예수님을 보았다. 힘들어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는데 이게 사역자의 길에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롬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시몬의 와이프를 어머니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때 우연히 예수의 십자가를 져준 것을 계기로 그의 가문은 사역자의 길에 들어섰고 그의 아들 루포가 사역자의 중심축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과 마침으로 그 일들이 일어난다. 우연인지 섭리인지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라고 얘기한다. 룻과 보아스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날마다 투쟁하고 사는 사람들의 특권인 것이다. 좋은 인연을 원하나? 날마다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살려고 고민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우연히 마침 그런 사람을 붙여주신다. 동역자와 파트너는 그 사람이 풍기는 모습을 보고 그냥 온다. 결국 동역자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서 투쟁하느냐를 보고 동역자를 붙여주신다. 그 그릇에 합당한 사람을 붙여주신다. 그 우연의 사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연속성이 없는 수많은 삶을 엮으시고 꿰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날마다 여호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룻의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삶과 보아스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의 만남. 이들을 통로로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들의 삶을 통로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신다.      

 룻은 놀라운 믿음의 고백 후에 시어머니를 따라갔다. 그런데 이스라엘 갔더니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수군수군하는 뒷다마들에 나오미는 숨기지 않고 ‘마라’라고 자신을 표현하면서 ‘나 죄인 맞아.’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나오미는 이미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율법을 보면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 하는데, 이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면 사사시대 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살지 않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교회에 가면 공동체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시큰둥한 반응과 돌봐주지 않는 분위기가 룻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순종하고 구걸을 했다는 것이다. 눈치 보며 이삭을 주으며 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아스가 보니 밭에 모르는 사람이 이삭을 줍고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 눈치도 없이 룻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일하는데 같이 껴서 이삭을 줍고 있던 것이다. 그녀가 고향에 있었으면 이런 고생을 안 해도 괜찮았을 텐데 이 길을 선택하고 순종했다.      

(룻 2:8-9)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8-9절을 보면 그 당시의 정서를 알 수 있다. 룻과 같은 자를 사람들이 쉽게 꾸짖거나 책망하기도 하고, 다른 하인들이 성적으로 희롱하기도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룻을 보면 내가 예수 믿으면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육체적으로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순종하고 간다. 더욱이 보아스를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감사하다고 표현한다.     

 보아스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호의를 베푼다. 그리고 룻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자에게 잘해주는 것은 호의가 아니라 의무이다. 보아스의 배려는 그의 성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연히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보아스의 배려로 룻은 한 에바나 보리를 줍게 된다. 한 에바는 약 20kg를 말한다. 하나님은 이런 성품이시다. 우리의 요구보다 더 풍성한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호의는 의무인데 이것을 일부러 말로 명령하며 지키게 하는 것은 그 당시가 율법이 무너진 시대라는 것을 말한다. 지금 우리도 율법이 무너진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룻과 보아스처럼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나님을 따라 산다는 것 자체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룻은 구걸을 해야 했고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룻은 이때 하나님을 위해서 자존심을 버렸다. 이때 하나님의 권능으로 바닥 친 사람을 다시 올려주신다. 그리고 보아스는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산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보아스를 통해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도 예수를 만난 사람인데 다른 이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보지 못한다면... 진정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면뿐 아니라 내면도 바꾸신다.     

(민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열두 명중 두 사람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을 했고 나머지는 사람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이때 보아스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드러나서 세상에 사랑을 증거 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인지 나를 통로 삼아 세상에 드러나게 하시기를 원한다. 수많은 공동체가 무너져갈 때 하나님만 온전히 따르는 공동체를 하나님이 쓰시기를 원하실 것이다.     

 나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라는 고백의 기도. 만나는 사람마다 진정한 축복을 비는 고백의 기도. 내가 사랑을 베푼 것이 호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성품이자 우리의 의무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예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하나님의 마음을 빌어 룻에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저를 보호해주세요.’라고 얘기했을 때 ‘보호해줄게.’가 아니라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냥 힘들고 어렵고 그럴 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꼬인 문제를 어떻게 풀고 있나?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면 기뻐서 상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시라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그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앞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올 수도 있다고 예측할 수 있다. 이번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보호무역주의를 쓸 것이고 무역거래가 힘들어질 수도 있고 미국의 금리가 더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실업률도 떨어져 있고, 가정마다 가계부채가 많이 높아져 있다. 우리나라가 더 휘청거릴 수 있는 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나오미와 같은 상황에 접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여호와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저축, 보험, 부를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 위험한 것이다. 부자였던 나오미 일가가 남편, 아들이 다 죽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보험 중에 의료보험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된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100%가 의료보험적용을 받을 수 있다. 의료보험 밖에 있는 사람은 엄청난 비용 때문에 그 서비스를 이용받지 못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아무 많다. 보험이 있어서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에 두는 저주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보호해주는 것은 보험, 예금, 집, 자식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다. 자식농사 믿었다가 쫄딱 망한 사람이 나오미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기독교인이 30%나 되는 대한민국이 살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 높은 실업률, 자살률, 타락...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우리의 부를 축적해나가기 시작할 때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은혜받은 우리가 하나님 은혜받은 대로 사랑과 은혜를 흘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어렵게 된 핵심 이유는 믿는 우리가 믿는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주어진 사람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공동체, 지역사회(다문화 외국인, 과부), 대한민국, 열방의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열방 회복의 핵심 국가가 동아시아로 다 넘어왔다. 1위 중국, 2위 인도, 3위 미국, 4위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마침 대한민국에 하나님께서 부를 부어주셨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최근 20년이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괜히 주셨나? 이 놀라운 부를 흘려보내지 않고 열방의 백성을 섬기지 않으면 이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기업 무를 자’라는 제도로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제도를 주신 정신과 가치관은 시대가 흘러도 변함이 없다. 그 시대상에 맞게 제도를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역사회 사람을 철저히 책임지는 활동을 지금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 제도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전부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10%를 정확히 어떻게 드려야 하나? 세전으로 해야 하나? 세후로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은 필요 없다. 100% 하나님께 다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의 것인 줄 잊어먹을까 봐 상징으로 드리는 것이 10%이다. 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다. 문제는 이것을 지키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선포되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 사는 것. 이것을 혼자 지키기 힘드니 공동체를 주셨다. 이는 충분한 경제적, 관계적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들어왔으니 진정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근간을 이룰 때 나머지의 원리도 제대로 작동한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제도는 훌륭하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영성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부를 흘려보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경제 위기가 오자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공동체는 더욱더 부유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옆의 땅들이 헐값에 넘어오곤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공동체와 그룹들은 더 많은 기회가 부어질 것이다. 헤세드 공동체가 기업 무를 자로서 열방의 리더로서 이끄는 축복이 있길 원한다.     

 성경의 관심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로 삼아 이방민족이 돌아오길 바랬다. 다윗과 예수의 계보를 잇는데 가장 음란한 민족의 여인을 그 가운데에 끼어주셨다. 2017년도 우리 공동체가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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