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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Dec 13. 2021

내가 쓰레기 줍기 1등이라니

쓰레기 줍는 것도 등수가 있나?

봉그깅 대회 마지막 평일.

오늘을 마지막으로 4시 퇴근이 끝난다. 4시 퇴근이라기보단, 퇴근 후 봉그깅하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같은 건 없고, 사실 오늘을 기다렸다. 매일 일이 끝나고 쓰레기 주우러 다니기가 꽤 힘들었었다. 특히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치울 곳에 비해 시간이 부족해서 힘든 것을 참고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열심히 치웠는데도, 결국 마지막 날에 치워야 할 범위가 가장 넓었다. 벼락치기


애초에 다 치우는 건 불가능했다, 해안은 너무 넓었고 난 혼자였다. 초반엔 같이 할 사람이 있었지만, 거긴 유명 관광지였고 지금은 마을 구석탱이 조각난 해안가다. 아무도 여기에 쓰레기가 많은지 모를 것이다.

범위도 넓었지만, 무엇보다 쓰레기가 많은 곳에서 도로변까지 너무 멀었다. 도로변에 쓰레기를 둬야 쓰레기차가 수거할 수 있다. 쓰레기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도로까지 어림잡아 200m. 무거운 쓰레기를 양손에 들고 돌로 뒤덮인 해안을 걸으려니 울부짖는 듯한 신음이 절로 났다.

특히 뒤엉킨 밧줄 덩어리는 물을 먹어 무게가 더 나간다. 족히 20kg은 넘어서 들기는 불가능하고 끌어야 하는데, 끌다가 돌에 걸린다. 끌다가 뒤돌아 풀어주고, 다시 끌고 풀고를 반복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왕복을 5번은 했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해는 이미 졌다. 돌밭에 색상과 명암이 없어져서 걷기가 위험할 때 즈음, 마지막 쓰레기 이동 작업이 끝났다. 시간에 쫓겨 열심히 뛰어다녔기에 그나마 이 정도까지 했다. 만약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면, 바다 중간에 쓰레기 더미를 만들고 그만둬야 했을 것이다. 욕심 버렸던 내 자신 칭찬해.


봉그깅을 마치고도 쓰레기는 많이 남았지만, 내가 옮긴 쓰레기도 많아서 뿌듯했다.


밤까지 봉그깅하다 지쳐 쓰러진 어떤 사람.


2주 동안 봉그깅 대회에 참여하면서, 처음에 받았던 마대를 다 썼다. 80L짜리 마대(대형) 15개, 40L 마대 30개.


우리 동네 바다가 많이 깨끗해졌을까?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 이제는 좀 낫겠지?

하지만 다시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면서 쓰레기가 몰려오진 않았을까? 원상태로 돌아가있으면 어쩌지...


내가 치웠던 곳이 깨끗한지 다시 가볼까, 생각했었지만 그만뒀다. 다시 쓰레기가 차있을 게 뻔했기에, 그 사실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마주하지 않는다고 쓰레기의 현실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나는 일단 휴식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불편함을 갖고 지내기 싫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가만히 두면 쓰레기는 쌓인다. 조만간 다시 마주하러 가보련다.

허탈감을 두려워 말아야지, 그게 현실이니까.


봉그깅 전후. 왼쪽이 기존의 모습, 오른쪽이 봉그깅 후의 모습. 조만간 다시 왼쪽 사진처럼 되어 있겠지?




봉그깅 대회. 대회인 만큼 시상도 있었다. 참가자의 반 이상에게 상품을 주는 것 같지만, 그래도 상품의 규모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상을 받는 게 목표는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매일 퇴근하고 쓰레기 주웠는데, 힘들기는 엄청 힘들었으니까. 나는 관심이나 인정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 '얼굴 없는 천사' 같은 위대한 일은 잘 못 할 것 같다. 관심 줘요, 관심 너무 좋아, 늘 새로워, 짜릿해


가장 큰 상품이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한 참가상이라도 충분하다. 어차피 나보다 훨씬 많이 쓰레기를 주운 사람들이 있어서 1등은 기대도 안 했다. (그분들은 제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엄청난 양의 마대를 채웠는데, 해양쓰레기 사냥꾼인 줄 알았다) 게다가 상품도 뭔지 몰랐다. 엄청 비싼 그런 상품이 아니라, 후원해준 기업에서 주는 제품 같은 상품이었다. 처음에 상품을 보고, 나한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금방 잊었다.

마침 집에 샴푸 다 썼는데 샴푸바(샴푸비누) 정도 받으면 유용할 거로 생각했는데...


참 시상품이 많다. 이거 말고도 상품이 25명치 더 있다. (출처 : 디프다제주 인스타그램)


엥, 근데 내가 1등이네?

어?

가장 상품이 많은 '하영봉그깅상'에 내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적혀있었다.


이상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에 놀라움과 기쁨이 조금 늦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의아함에 예전 글을 찾아 시상기준을 다시 찾아봤는데, '최다 봉그깅'이라고만 적혀있었다. 그때야 '아, 이거 횟수로 따지는 거였구나' 싶었다.

나는 매일 퇴근 후에 봉그깅을 했으니, 횟수로는 가장 많을 거다. 나보다 많이 하려면 주말까지 꽉 채워야 했는데, 나는 주말에도 봉그깅에 참여했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나 양으로 따지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 테지만, 주최 측은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냥 인스타그램 포스트 수로 따질 수밖에.

관심을 받는 건 좋아하지만, 이렇게 너무 큰 관심은 부담인데


음... 내가 가장 큰 상에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제주 바다를 지켜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감사히 받아야지! 헤헤


SNS에 포스팅하면서 1등 소감을 죽 적었다. 누가 보면 연말 시상식에서 1등한 줄 알았겠다. 그런데 감사의 포스팅을 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지?


인스타그램에 '봉그깅대회' 해시태그(#)가 붙어진 사진들. 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셨다.


봉그깅대회를 열고 수상자로 선정해준 주최, 디프다제주?

이곳저곳 쓰레기가 많았던 우리 동네 바다?

봉그깅대회에서 만났던, 함께 봉그깅했던 사람들?

봉그깅하면서 "좋은 일 하시네요" 말 걸어주셨던 사람들?

쓰레기를 수거해주신 읍 행정복지센터 담당자?

나를 봉그깅으로 이끌었던, 광치기 해변에서 쓰레기를 줍던 아이들?

매일 쓰레기 사진 올렸는데 묵묵히 '좋아요'를 눌렀던 인스타그램 팔로워?

아님 시키지 않았지만 혼자 열심히 쓰레기 주운 나 자신?


얽힌 인연이 많고, 그 인연 사이에서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것 같다.

이 행복을 만들어 준 크고 작은 인연들 모두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모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는 모르겠고 할 수 있는 만큼만 꾸준히 제주 바다를 깨끗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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