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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중정원 Feb 02. 2022

눈 다래끼와 열십(十)자.

이번 설 연휴는 참 길었다. 길고 긴 연휴동안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못 봤던 영화도 보고, 그동안 밀린 잠을 몰아 자는데, 설 전날 눈을 뜨니까 왼쪽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눈 다래끼였다.


“으이구. 그렇게 늦게 자고 술 마시고 하니까 그렇지.”


제일 먼저 날아온 건 같이 사는 엄마의 핀잔이었다. 고소하다는 듯이 말하는 엄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거울만 바라보며 눈을 위로 떴다 아래로 떴다 하며 눈꺼풀이 얼마나 부었는지를 살필 뿐이었다.


“약 없어? 너무 가려워.” 내가 말했다.


“약이 어디 있어. 더군다나 설 연휴인데. 소염 진통제라도 먹어야 하나.”
 

화장실에서 엄마가 약이 들어있는 찬장을 뒤지는 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상처에 손이 닿지 않도록 가려운 눈을 긁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 내 눈이 마치 경기 중 상대 주먹에 얻어터진 격투기 선수의 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엄마! 나 한 대 맞았어!” 하고 엄마에게 말했다가 ‘정말’ 등짝을 한 대 맞았다.


“뭐 자랑이라고 농담 따먹기를 해! 그러니까 술을 적당히 마셔야지!” 엄마가 호통을 쳤다.


“아, 시골에서 술 없이 어떻게 삽니까!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신담? 호호.”


엄마의 꾸지람에 너스레를 떨며 웃어넘겼다. 그렇지만 좀 억울한 면도 있었다. 아니 눈 다래끼가 난 게 내 잘못인가. 자고 일어나니까 어느덧 내 눈에 깊게 자리 잡은 녀석인걸. 그 순간 문득 든 생각은 다래끼란 녀석은 어쩌면 짝사랑이랑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어느 순간 내가 모르게 내 눈앞에 생겨나서 온 신경을 그곳에 집중시키게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입맛이 씁쓸해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다래끼 같은 존재가 된 적이 있었나? 반면 나한테는 그런 존재가 있었던 적이 많았고, 다 끝이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갑작스럽게 센티멘털해진 마인드를 엄마가 찾아온 소염 진통제와 함께 삼켜버렸다.


오후에는 외할머니 댁을 찾아뵙기로 했다. 설날 당일 눈이 많이 온다는 소식에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더 시골인 외할머니 댁으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될까 염려에서였다. 부모님을 태운 채 차를 끌고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 버선발로 외할머니께서 반겨주셨다.


“아이고, 우리 OO이가 다 왔어? 얼굴 보기도 힘들어 이젠~” 외할머니가 말했다.


“아이, 뭘 힘들어요. 다 시간 내면 되지. 바빠서 그렇지만. 할아버지는요?” 내가 물었다.


“느이 할아부지는 옆 동네 마실 갔어. 어여 들어와.”


할머니는 오랜만의 ‘손주님’ 행차에 너무나도 반가워해 주셨다. 좀 자주 찾아뵐걸.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외할머니와의 만남을 뒷전에 놓은 내가 내심 부끄러웠다.


“엄마, 얘 다래끼 났어. 약 없어?” 엄마가 할머니댁 거실에 앉으며 외할머니에게 말했다.


“잉? 다래끼가? 우짜다 눈 다래끼가 다 났어?” 외할머니는 급히 달려와 내 눈을 살펴보셨다.


“모르지. 하도 술을 처 드셔서 그런지도.” 엄마가 나를 흘겨보며 외할머니에게 말했다.


“이눔아, 술을 왜 그렇게 먹어. 젊은 놈이. 있어봐. 할미가 약 줄게.”


안방에 들어간 할머니는 잠시 뒤 실타래와 바늘을 가져왔다.


“할머니, 이게 뭔데? 이게 약이야?” 내가 물었다.


“다래끼가 났을 때는, 옛날에 으른들이 그랬어. 엄지손톱에 열 십(十)자를 그으면 낫는다고.”


외할머니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늘이 꽂힌 실타래를 들며 말했다. 아니 뭔가 먹는 약도 아니고 웬 열 십(十)자? 손톱을 바늘로 자극하면 뭔가 경혈(經穴)점이라도 자극되어 눈에 영향을 주나?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때는 도저히 효험이 없는 민간요법처럼 들렸다. 그러나 나를 위해 진지하게 실타래에서 바늘을 골라 빼는 할머니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낫든 낫지 않든 어떠냐. 나를 위한 할머니의 마음이 이렇게 느껴지는데. 손톱이고 발톱이고 열 번도 더 십(十)자를 그릴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할머니께 손톱을 맡겼다.


“할머니, 안 아프게 해 주셔.” 내가 말했다.


의식(?)은 생각보다 금방 끝이 났다. 엄지손톱과 엄지발톱에 바늘로 십자를 그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30초도 되지 않았다.


“이러며는, 금방 나아. 옛날엔 으른들이 다 이렇게 했어.” 외할머니가 말했다.


“알겠어유. 할매가 이렇게까지 해 줬는디 금방 낫겄지 뭐.” 나도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손톱에 그려진 십자 모양의 자국이 나를 위한 할머니의 마음이 나에게 새겨진 것 같아 퍽 사랑스러웠다. 이후는 할머니께서 해 놓으신 녹두전에, 감주에 명절 음식을 맛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할머니 댁을 떠났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내 널찍한 손톱 위에 할머니께서 바늘로 그린 열십(十)자는 그나마도 자국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렇지만 나를 위한 할머니의 마음은 내 가슴 속에 깊게 새겨져, 할머니와 만든 추억을 평생 죽기 전까지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책상에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렌즈를 반쯤 걸친 채로 타이머를 맞춰 양 엄지를 모으고 사진을 찍었다.


너란 다래끼. 아침부터 참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해 주네. 네가 밉지만은 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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