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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중정원 Jan 29. 2022

대천해수욕장 혼전(?)여행기

“OO아, 부탁이 있어.”


친구가 내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같이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카페에 들러 청포도 에이드를 마시다 말고 갑작스럽게 무게를 잡으며 하는 말에 약간 걱정이 됐다.


“뭔데?” 내가 대답했다.


“너, 나랑 여행 갈래?”


“갑자기 나랑? 왜?” 의외라는 표정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가 되물었다. 행여나 돈이라도 빌려달라거나, 뭔가 보증이라도 서 달라고 할 것 같던 표정에서 겨우 나온 말이 여행 좀 같이 가자는 말이라니.


“그냥. 결혼 전에 여행이 가고 싶어.”


그래. 내 친구는 지금 결혼을 두 달 즈음 앞두고 있다. 분명 서로 너무나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고, 결혼을 준비하며 생기는 사소한 다툼 속에서도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준비를 해 왔던 친구도 이제 슬슬 실감이 나며 뭔가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결혼 전 여행이라….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 같은 건가? 너랑 내가? 단 둘이?” 내가 말했다.


“역시 안 되겠지?” 친구가 정말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친구의 처진 눈꼬리와 팔(八)자를 그리는 눈썹이 애처로워 보였다.


“안 될 건 없지. 날짜만 미리 맞추면. 어디 가고 싶은데?”


“그냥 바다. 바다가 보고 싶어.”


그렇게 이 주 뒤, 카카오톡 메시지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OO님, 전에 드렸던 부탁 아직 유효한가요?” (한껏 귀여운 이모티콘)


“네, 유효합니다. 언제?”


“가능하다면 OO님의 다음주 일, 월요일을 빌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한껏 공손한 이모티콘)


하필 여행을 가도 뜬금없는 일, 월요일이라니. 그렇지만 그 편이 사람도 없을 것 같았고 미리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귀찮았던 나는 친구의 제안에 동의했다.


“월요일 휴가 올릴게. 가자.”


그렇게 친구와의 혼전(?) 여행이 계획되었다. 목적지는 목포. 혼자 여행을 자주 다니는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도 여행지 추천을 종종 받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이 친구에게 물어보면 항상 답변은 ‘목포’였었다. 아무 연고도 없고 정작 친구 본인도 가보지 못했지만 자기 딴에는 언젠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런 고로,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친구가 그토록 평소에 바라던 그 곳으로 정했다. 그러나….


[속보] ‘전남 일대, 코로나19 오미크론 우세종 확산지 지정….’


뉴스속보가 난 건 여행 출발 하루 전이었다. 갑작스럽게 우리가 목표로 하던 목포가 속한 전남 지역이 코로나19 오미크론 바이러스 확산지역으로 지정되어 선뜻 방문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둘 다 백신 부스터 샷 접종까지 완료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 어딜 그렇게 쏘다니면서 사람들을 걱정시키려고 하냐며 친구 집에서 목포 여행은 꿈도 꾸지 말라는 엄포가 떨어진 것이다.


“어떡하지, 목포는 안 될 것 같은데….” 친구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나 같았으면 아예 여행 자체를 취소할 것 같은데, 애초에 친구는 어디든 갈 생각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상관없어. 너 가고 싶었던 데니까 가려고 한 거지. 다른 곳 바다 보러 가. 속초는 어때? 동해 바다 좋잖아.” 내가 대답했다.


“아, 속초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데.” 친구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가며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는 혼전 여행(?)이라는 것에 한껏 기대를 부풀렸을 것이며, 가보고 싶은 여행지였던 목포를 드디어 가 본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코스를 짜거나 숙박업소를 미리 예약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관광 비수기이기도 했고, 우리 둘 다 일-월요일 사이에 잠잘 곳 정도야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막연하고 낙관적인 생각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그 덕에 숙소를 취소하랴, 차 편을 취소하랴 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덜었다.). 끙끙대며 고민만 하고 있던 친구에게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추억이 깃든 대천해수욕장은 어떠니?”


“!!!”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몇몇이 모여 보령에 위치한 대천해수욕장에 종종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천해수욕장은 우리가 살던 곳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유명한 해수욕장이기도 했고, 멀지 않은 거리로 교통비 부담이 덜해 학생들의 가난한 주머니 사정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그래서 학교 친구들과 민박집을 잡고 여름방학이면 물놀이를 즐기러, 겨울방학이면 겨울 바다의 낭만을 즐기러 두 시간짜리 입석(立席)기차를 타고 충남 보령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좋아. 대천! 우리의 추억! 내가 내일 OO에서 볼일 보고, 너 픽업하러 갈게. 집 앞 카페로 나와. 두 시까지.”


“알았어. 출발하면서 얘기해.”


친구는 다시금 활력을 되찾은 목소리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수화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멀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기 편하고 뭐. 그렇게 전날 밤 급하게 여행지를 바꾸고 잠을 청했다. 소풍 전의 설렘 같은 것도 없었다. 워낙 친했던 친구이기도 했고. 어차피 겨울 바다에 가서는 할 게 없다는 것쯤은 이미 15년 전에 알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혼전 여행 계획 완료.



“어디야~?”


먼저 전화를 건 것은 내 쪽이었다. 볼일이 있어서 어디를 들렀다 온다고 했는데, 오후 1시 반이 지났는데도 연락 한 통 없는 친구가 슬슬 불안해지던 참이었다. 내 친구는 원래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편은 아니었기에.


“아, 선생님! 지금 가고 있어요. 약 20분 뒤에는 도착해요!”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설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카페에 먼저 가서 커피 한 잔 하고 있을게. 천천히 와.”


친구가 카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시 15분쯤이었다. 한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손에 그건 뭐니?” 내가 물었다.


“PCR 자가진단키트! 우리 둘의 안전한 혼전(?) 여행을 위해!” 친구가 화답했다.


“그… 그래. 너 덕에 처음 해 보네 이거. 어떻게 한다고?”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검사키트 상자를 들어올렸다.


“나도 봐야 돼. 처음 사 봤어.”


믿음직스럽지 않은 친구의 대답을 끝으로 한참동안 둘이서 설명서를 살폈다. 그러니까 왼쪽, 오른쪽 콧구멍에 면봉을 깊이 찔러 10번을 휘젓고, 그 면봉을 검사용액에 10번을 휘젓고, 검사키트에 용액을 4방울 떨어뜨려서 검사…. 생각보다 복잡한 듯 단순하게 잘 되어 있다. 검사키트의 ‘C 부분’에 한 줄만 그어지면 통과(?)란다.


“나부터 한다.”


호기롭게 키트를 뜯어서 내가 먼저 검사를 했다. 코로나 검사를 몇 번 받아본 터라,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그렇지만 검사를 ‘받을’ 때처럼 내가 내 스스로의 코를 깊게 찌를 수 있으려나? 면봉을 들고 콧속 깊이 찔러 휘젓기 시작했다. 눈물이 찔끔 나고 재채기가 나올락 말락 하는 걸 보니 맞게 했나 보다. 용액에 면봉을 담그며 친구를 보자 친구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는 콧속을 헤집고 있었다. 어찌나 웃기던지. 그놈의 여행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다시금 코로나가 망가뜨린 일상이 체감되었다.


용액을 키트에 떨어뜨린 후 15분 대기. 나오려던 재채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결과는 둘 다 음성. 우리 둘 다 코로나와 거리가 멀었다.


“가자!”


안전한(?) 검사결과에 친구가 신이 나서 마시다 만 커피를 집어 들고 벌떡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씨익 웃으며 짐 가방과 커피를 챙겼다.


“대천해수욕장 찍어.” 친구의 차에 타면서 내가 얘기했다.


“숙소는?”


“내가 할게. 너 운전하는 동안. 우리 둘인데 어디 허름한 민박집이라도 있겠지.”


주섬주섬 차에 타서 외투를 벗고. 드디어 둘의 혼전 여행이 시작되었다. 친구의 낡은 아반떼를 얻어 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 차 그때 그 차야? 사고 몇 번 났던?”


“아니다. 그 차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지. 어차피 중고지만.” 내비게이션을 설정하며 친구가 말했다.


우리 둘 다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이고, 평소에도 전화를 자주 주고받는 편이다보니 어색함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단 둘이 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괜히 좀 설렌다? 그치? 나 바다 한 2년 만에 가는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나는 친구랑 단 둘이 여행 가는  처음이야. 우리 커플룩 맞출까?”


친구의 말에 질색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당연히 주제는 친구가 앞두고 있는 결혼.


“행복하니?” 친구를 보며 물었다.


“아, 행복하죠. 그럼요.” 친구가 답했다.


“근데 무슨 그 난리를 치면서 혼전(?) 여행까지 가자고 해.”


“아, 그 기획 당시에는 참 혼란스러웠지. 준비는 다 되었는데, 정말 하는 건가 싶고. ‘이제 노는 것도 끝이다.’ 하는 생각도 들고. 여러모로 좀 답답하고 그랬는데, 이제 괜찮아. 예비 배우자랑 얘기해 보니까 순식간에 그런 답답함이 사라지더라.”


확실히 친구는 여행을 제안하던 때보다는 훨씬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때 당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얘기하던 친구가 이제 눈동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왜?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어떻게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기셨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냥. 내가 뭘 해도 좋고, 나한테 뭘 줘도 아깝지 않대. 나도 그런 마음이었거든.” 친구가 답했다.


친구는 좋은 배우자 상대를 만났다. 상대방이 그렇게 마음을 갖고 있다면 서로 배려하고 미루어 좋은 가정생활을 꾸려 나갈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생각이 또 꼬리를 물었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러 숙소 예약도 하고, 과자도 몇 개 집어먹고 하다 보니 대천해수욕장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친구와 정말 신나게 떠들고 노래도 크게 틀고, 맘속에 있는 얘기를 터놓으며 지루한 줄을 몰랐다. 우리가 오랜 시간이 걸려서 왔다는 것을 노르스름한 하늘빛이 보여주고 있었다.


대천해수욕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내 눈에 보인 광경은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다른 곳으로 잘못 설정했나 싶은 생각이 들게끔 했다. 그만큼 15년 만에 오는 그 곳은 내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야, 지금 여기가 우리 기차역갈 때 버스 타던 곳 아니야?” 내가 물었다.


“맞는 것 같은데…. 근데 이렇게 번화가였나…?” 친구 역시 새삼 달라진 대천의 모습에 말끝을 흐렸다.


“좀 더 해수욕장 쪽으로 가 보자. 더 깊게.” 내가 말했다.


차는 곧 해수욕장을 따라 난 해안길(?)로 접어들었다. 일요일 저녁이라 썰렁한 해수욕장을 기대했건만 웬걸. 그 일대는 한창 붐비는 중이었다.


“아, 이리 와! 싸게 줄게! 구경 그만하고! 잘해줄게! 여기, 여기!”


방금 도착한 우리에게 호객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무슨 강남이야? 사람 왜 이렇게 많아?”


주변에는 정말 가족단위, 젊은 친구들, 커플 단위 할 것 없이 사람이 가득했다. 아니, 오늘 일요일이고 내일 월요일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내일 일정이 없나? 거짓말 조금 보태 내일 우리나라 일시정지 되나 싶을 정도.


“일단! 바다를 보자.” 친구가 말했다.


차를 근처 공중화장실 앞에 세우고 바다를 향했다. 그 사이 해수욕장 초입에서 봤던 노르스름한 하늘은 어느덧 주홍빛에 더 가까워졌다. 옆에 있는 친구와 함께 노을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탁 트인 바다와 저물어 가는 해. 그리고 파도 소리. 뛰어노는 몇몇의 아이들 소리. 모든 것이 감성을 풍부하게 하는 여행의 마무리 코스로 완벽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가서 서봐. 사진 찍어줄게.” 내가 말했다.


“오, 혼전(?) 사진? 좋지! 해를 배경으로 찍어줘.”


친구는 사진을 찍어준다는 말에 반색을 하며 바다 쪽으로 달려 나갔다.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인데, 이렇게 쉽지 않은 여행에 함께한 기념으로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 나 인증샷도! 하트 한 것도 찍어줘!” 친구가 소리쳤다.


“적당히 하자. 보는 눈이 많다… 응?” 이를 악물고 내가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친구의 연인을 위해 아낌없이 사진을 찍어주고, 반대로 내 차례가 되어 나도 피사체(被寫體)가 되어 열연을 펼쳤다. 한참동안 소녀감성으로 까르륵 웃어가며 사진을 찍다가 친구가 웃음을 뚝 멈추고 말했다.


“다 했다. 짐 풀러 가자.”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만큼 대천의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매서웠다.


숙소는 해안가 근처 펜션이었다. 이름만 펜션이고, 사실상 건물 하나를 여러 명이 투숙할 수 있게 만든 모텔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개인정비시간. 30분. 통화 좀 하고 올게.”


친구는 이 말을 남기고 전화를 들고 밖으로 사라졌다. 아마 예비 배우자와 통화하며 여행 상세내역 및 향후 일정을 보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숙소 보일러를 한껏 틀고 뜨끈해지려는 방바닥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으니, 친구가 곧 들어왔다.


“밥 먹자. 아까 찾은 곳 콜?” 내가 물었다.


“오케이. 일반 조개구이랑은 다르다 이거지? 가자!”


대천해수욕장에 도착하기 전에 친구와 차에서 찾아본 곳은 바로 키조개삼합을 파는 식당이었다.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식당까지 이동하는 길을 걸으며 화려한 간판이 달린 즐비한 식당들과, 높은 호텔 건물들을 보며 역시 대천해수욕장이 15년 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오락실 있다. 이따 밥 먹고 오다가 코노(코인노래방)도 들르자.” 친구가 길가에 있는 허름한 오락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 돼? 저기도 9시까지 아냐?”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곧 도착한 식당. 일요일 저녁 7시라는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가족단위, 커플단위, 친구단위의 여행객들로 식당은 북적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하니 인상 좋아 보이는 사장님이 와서 말을 건넸다.


“둘이 먹기에는 2인분은 적어(?). 어차피 먹다가 또 시킨다니까! 그러면 리필은 가격이 두 배야! 그냥 중(中)자리로 시키는 게 어때?”


너스레를 떨며 사장님은 우리가 더 많이 먹기를 원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모자라면 더 시키겠다고. 어차피 나나 친구나 키조개 삼합으로 배를 채울 생각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숙소에 가서 2차로 음식들을 더 시켜먹을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다. 곧 세팅된 철판이 나왔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이 마실 술도 주문해 한 잔씩 따라 마셨다. 역시 일요일 밤엔 소맥이지.


지글지글 철판 위에서 차돌박이며, 숙주, 키조개, 전복, 키조개 관자가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김치를 안주 삼아 친구와 술 한 잔을 더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전복이 펑! 소리를 내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뒷면이 껍데기고 앞은 살인데, 이걸 뒤집어야 하는 건가? 연이어 펑, 펑 소리가 나자 지나가던 사장님께서 깜짝 놀라 달려오셨다.


“아이고, 이걸 놓고 가기만 하고 아무도 안 봐 줬네!”


이제 보니 이곳의 시스템은 철판에 마련된 음식을 가져다 불판 위에 올려주고, 오며 가며 직원들이 먹을 수 있게 구워주는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우리 음식이 그냥 불판위에서 타고 있었던 것을 우리도 알게 되었다.


“아이고, 이거 미안해요. 탄 거는 바꾸어 주고 차돌(박이)도 조금 더 갖다 줄게!”

“아이고 사장님. 감사합니다. 너무 친절하세요. 역시 장사가 잘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니까!”


연신 미안함을 표현하는 사장님께 친구가 너스레를 떨면서 대답을 했다. 회사에서 영업직을 하고 있다더니 점점 더 능청스러워 지는 것 같다. 사장님은 곧 고기를 가져다주시며 서비스라고 무한리필 조개구이를 주문한 사람들만 갖다먹을 수 있다는 떡볶이도 조금 가져다 주셨다.


“넌 어째 점점 더 능글맞아진다?” 글라스에 담긴 술을 들이키며 내가 말했다.


“우리 나이도 나이고.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어? 둥글둥글한 게 좋은 거지.” 친구 역시 따라 술을 들이켰다. 결혼을 앞두고 사람이 된 건지. 내가 알던 친구는 원래 이렇게 유순하기보다는 오히려 한 마리 ‘야생마(野生馬)’에 가까웠었는데. 세월의 흐름 탓인지 일하면서 이곳 저곳이 닳고 마모되어 둥글어진 것인지. 아니면 예비 배우자의 끝없는 사랑이 친구를 저렇게 안정시킨 것인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변한 친구의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장님이 처음에 우려하며 더 음식을 시켰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우리가 주문한 것만으로도 너무 배가 불러 음식이 1/3 정도 남았다. 술도 소주 두 병에 맥주 세 병 정도밖에 먹지 않았는데. 사장님께서 후하게 주신 서비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너무 배불러! 우리의 2차 계획이!”


한껏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친구가 가게를 나오다 탄식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숙소에서 배달로 어떤 것을 시켜 2차로 먹을지 까지 이미 휴게소에서 다 정했기 때문이었다. 치킨도 한 마리 시키고 가는 길에 라면도 사서 국물 안주삼기로 했었는데 1차에서 술이 아니라 밥(?)을 너무 많이 먹어 버렸다.


“그럼 아까 말한 대로. 노래로 소화 좀 시키자.” 내가 말했다.


“잠깐! 그 전에. 여기 바다에서 가깝지 않니?” 친구가 물었다.


“그렇지. 밤바다 보고 갈까?”


“밤바다 하면 또…. 그거지.”


편의점으로 자신만만하게 향한 친구는 곧 손에 발사형 폭죽 2개를 들고 돌아왔다.


“이거 해도 되는 거야? 안 되는 거 아니야?”


“안 된다고 붙어있긴 한데, 그래놓고 발사한 폭죽을 꽂아둘 수 있게 마련한 저 통은 좀 아이러니하지 않니?” 친구가 가로등 옆의 길다란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안가에서의 폭죽놀이는 금지라는 현수막 아래, 쓰레기통이라고 하긴 조금 애매한, 마치 화살통처럼 생긴 용기(?)가 있었다. 하면 안 되지만 걸리지만 말라는 건가?


“그리고 정말 안 됐으면 편의점에서 이거 팔지도 않았겠지.” 친구가 말했다.


“그래. 하다가 안 된다고 누구 오면 그때 가서 미안하다고 하자.” 나도 인생의 모토를 친구에게 거침없이 내뱉고 각자 폭죽을 들었다.


“너 먼저 해. 사진 찍어 줄게.” 친구가 말했다.


“진짜 데이트코스네 제길….” 친구가 폭죽과 함께 사온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내가 말했다.


기다랗고 제법 무거운 폭죽은 연이어 ‘피융-’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미약한 불빛 10발을 쏘아 올렸다. 친구도 이어서 폭죽에 불을 붙여 발사를 시작했다. 바다의 암흑은 모래알 같은 빛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다행히 불꽃 파티를 하는 중에 누가 제지하러 오는 일은 없었다. 둘 다 발사를 마치고 합장(合掌)한 채 해안가에 위치한 숙소에 대고 사과를 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락실에 있는 코인노래방에 들렀다. 친구가 다른 친구들이 자기한테 축가를 불러주기로 했는데 후보곡들을 좀 들어달라며 나에게 연이어 축가 후보 메들리를 들려주었다. 흔한 노래를 제외하고, 좀 밝은 템포의 노래를 골라주었더니 그 노래를 두 번 정도 더 부르더라. 아니, 축가를 듣는 입장인 자기가 왜 힘을 주는 건지. 열창을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10시가 넘었다.


“어떻게…? 맥주 한잔 더 할래?” 취기가 약간 모자란 내가 물었다.


“너무 배불러. 맥주 1,000㏄만 사서 들어가자. 과자 한 봉지랑.”


1차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술에 너무 취해서가 아닌 너무 많이 먹어서. 우리의 2차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별다른 얘기도 없이 둘이 TV를 보다가,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친구가 기대하던 혼전(?) 여행이 이런 것이었을까? 별다른 것 없는 여행 코스였지만, 생각해보니 이런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피곤하던 터라 나도 곧 자리를 정리하고 누워 시계를 보니, 시간은 12시도 되지 않았다. 옛날의 친구와 나였으면 아직 한창이라고 달렸을 시간이었는데. 둘 다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친구는 일찍 일어나 예비 배우자에게 모닝콜을 해야 한다며 숙소 밖으로 나갔다. ‘저렇게 해야 결혼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친구가 나간 숙소 문을 바라보다 다시 잠에 들었다. 잠시 후 돌아온 친구는 커피를 사러 편의점에 갔는데, 무슨 편의점이 문을 닫냐며 툴툴대고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부스스한 채, 친구가 컵에 타 준 커피를 받아 마셨다.


“오늘은 계획이 어떻게 되십니까?” 내가 물었다.


“이제 집에 가야지. 나가서 해장하고.” 친구가 말했다.


“해장할 정도로 마시기나 했어야 말이지.” 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침 밥 먹는다고 생각하기로 해요 우리.” 친구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곧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숙소에서 나와 친구가 검색으로 찾은 근처 해물뚝배기 집으로 갔다. 해물 뚝배기라는 이름이기에 제주도에서 앞앞에 한 그릇씩 주는 그런 개인 뚝배기를 생각했으나, 이곳의 방식은 달랐다. 그냥 큰 무쇠 솥 하나에 2인분을 끓여 주는. 그러면 이게 해물탕이랑 뭐가 다르지. 친구에게 볼멘소리를 하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은 이후, 둘 다 밥 한 공기를 싹 비울 때까지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해장할 정도의 숙취는 아니었지만 아침의 빈 위장에 온갖 해물이 모여 만들어 낸 시원한 육수는 너무나도 짜릿했다.


이후 돌아오는 차에서 친구는 연신 회사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발주를 몇 개 넣으라느니, 이번에 어디 지점에 몇 개를 갖다 주라느니. 친구의 전화기에 불이 나는 것을 보고 오늘이 월요일임을 느꼈다. 그래. 남들은 다 일하고 있는 오전 시간에 우리는 지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구나. 회사로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업무들이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기분은 정말 상쾌했다. 한적하진 않지만 나름 쌩쌩 차들이 내달리는 고속도로를 타고, 내 옆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 가장 친한 친구와 멀리 보이는 서산 인근의 목초밭 풍경까지. 무슨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술을 진탕 마신 것도 아니고 뭔가 짜릿한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나름 즐거운 혼전 여행이었다. 15년 만에 친구와 방문한 대천해수욕장에 그렇게 또 추억을 한 자락 남기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안녕, 대천. 또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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