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중정원 Jan 17. 2022

좁은 샤워실에서 날아간 데이터.

(다소 선정적인 상상력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위이잉’


사무실에서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카톡이 울렸다. ‘웬만한 단체 채팅방 알림은 다 꺼 놨는데? 뭐지?’ 하고 휴대전화 잠금을 풀어보니


“나 왔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10년지기 친구였다. 이윽고 따라오는 사진 한 장. 익선동 어딘가 즈음을 유추하게 하는 번화가 고층 빌딩과 구식 가옥의 기와 처마가 어우러진 풍경.


“서울? 갑자기?”


무심결에 답장을 하고 보니, 오늘은 평일인데? 타 지역에서 지금 한창 영업하고 있어야 할 친구가 갑자기 왜 종로에 나타났는지 묻기도 전에, 빠르게 답장이 도착했다.


“점심 먹자. 너네 회사 앞에서 봐.”


쿨하게 ‘이응 두 개’로 답변을 마친 후 다시 일에 집중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친구의 등장에 집중의 흐름이 끊겨버렸다.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텀블러에 커피 스틱을 뜯어 넣었다. 뜬금없이 왜 올라왔지.


오전 근무시간은 시간이 짧아 생각보다 빨리 가는 편이다. 12시가 되어 사무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추운 날씨에 발을 굴러가며 기다리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왜 밖에 서 있어. 어디 들어가 있지. 아님 안에라도 들어와 있든가.”


“커피는 벌써 세 잔 마셨고, 딱히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그래도 온 지 한 15분밖에 안 됐어. 너무 춥다. 국물 있는 것 중에 맛있는 데로 가자.”


 꽁꽁 얼어붙은 수준까진 아니고 살짝 살얼음이 낀(?) 친구에게 이런저런 회사 관련 불평을 늘어놓으며 근처 수제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뭔 일이니 갑자기? 이 평일에?”

자리에 앉아 수저를 놓으며 내가 물었다.


“나 결혼해야 할 것 같아.”

뜬금없이 던지는 10년지기 친구의 결혼 얘기에 물컵에 따르던 물을 조금 흘렸다. 뭔가 얘기할 것이 있을 것 같긴 했었는데 결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친구는 내가 알기로는 결혼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다. 한 군데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고 마치 역마살이 낀 것처럼 ‘이성 편력(遍歷)’을 가진 친구이다. 조금이라도 감정의 교류를 나누며 연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던 상대의 숫자는 아마 요즘 기준으로 초등학교 ‘한 학급’ 정도의 명수는 너끈히 채울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라 한 번에 두 사람을 만나는 일명 ‘양다리’를 한다거나, 만나던 사람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난다든가 하는 것 없이 한 번에 한 명 씩만. 단지 누굴 만나도 관계가 오래 가지 않고, 금방 애정이 사그라지는 편일 뿐.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또 누구 만났나본데? 실례지만 본인 입에서 나온 결혼 얘기가 이번이 몇 번째인지는 아시는지?” 퉁명스럽게 친구의 말에 대꾸하며 친구를 일갈(一喝)하려고 했으나, 친구는 표정이 더욱 진지해진 채 아무 말도 없었다.


“혹시 사고…? 너?” 입을 꾹 닫고 있는 친구의 표정이 걱정되어 내가 재차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뭔가 느낀 게 있어.” 친구가 답했다.


“뭔데?”


“너 내가 새로운 사람이 생길 때마다 같이 오는 데가 어딘 줄 알아?”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어딘데?”


“종로 OOO호텔. 인사동 근처. 너도 본 적 있을걸?”


“아, 그 간판 커다란 그? 앞으로 갈 일 있어도 안 가야겠네. 근데 거길 왜? 싸서?”


“거긴 샤워실이 되게 좁아.” 비장한 표정으로 친구가 말했다.


“뭔 소리야. 미X….” 친구의 어이없는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오기에 욕지거리로 대답을 해 줬다.


“아니, 근데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그게 아니고. 보통 우리가 같이 하룻밤을 보낸다고 하면 당연히 그걸(?) 하잖아?” 친구가 대화를 이어갔다.


“야, 이 나이 먹고 ‘그거’가 뭐야. 사랑을 나눈다고 해.” 벌건 대낮부터 높아지는 대화 수위에 내가 핀잔을 주었다.


“아, 그래. 그 우리가 ‘애프터 러브(?)’ 후에, 이제 정리도 하잖아?”


“아, 자꾸 상상하게 하지 마! 뭔데! 밥 시켜 놓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정리를 할 거 다 하고, 나는 보통 같이 씻는 걸 좋아해.”


“하…. 제발.”


듣기가 괴로워 입에서 내 입에서 나지막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왜 내 친구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을 상상해야 하는가. 그것도 곧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할 타이밍에.


“그 호텔 샤워실은 두 명이 들어가기는 좀 좁아. 그렇다고 못 들어갈 수준은 아니야. 그 비좁은 공간인 샤워 부스에서 같이 씻으면서 이제 얘기도 더 하고, 장난도 치고. 그러면 뭔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이면서 서로 더 가까워지는 생각이 들어서 그 순간이 나에게는 그 사람과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된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 좁은 샤워실이 있는 호텔에 계속 가는 거고.”


“너 이런 얘기 하는 게 나한테 실례라고는 생각 안 하니?”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힌 채 친구를 흘겨보며 내가 물었다.


“응, 안 해. 너랑은 그래도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하잖아. 너 아니면 어디가서 이런 얘기 못 하지.” 친구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침 그 진지한 분위기를 깨 주기라도 하듯, 주문한 수제비가 나왔다.


“그래.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자. 벌써 20분이다.”

하며, 커다란 단지에 나온 수제비를 작은 그릇에 덜어 친구 앞에 놓아주었다. 허나, 친구는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 아직까지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야, 먹어. 나 먹고 얼른 들어가 봐야 돼. 오후에 미팅 있어. 시답지 않은 얘기면 나중에 전화로 하고.”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내가?” 얼빠진 사람처럼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 같이 씻는 거 좋아한다며. 그… 사랑을 나눈 후에.” 보다 못한 내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해 주었다.


“아, 그렇지. 근데 매번, 내가 누구랑 함께 오든 간에, 그 좁은 샤워 부스에서 단 둘이 거의 밀착한 채로 같이 씻다 보면 나는 그 순간 바로 직전에 함께 왔던 연인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어.”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수제비를 한 술 떠 넣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오늘 S랑 왔어. 근데 가장 최근에 그 곳에 같이 왔었지만 지금은 헤어진 J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는 얘기야. 그 샤워 부스에서 서로 알몸이 되어 같이 씻는 동안.” 친구가 음식을 뜨기 시작하며 얘기했다.


“별걸 다 신경 쓰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근데 그게 너한테는 한둘이 아니잖아.” 하고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 J전엔 H, H전에는 Y, Y 전에는 C....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왔던 그게, 이번에 새로 사귄 연인이랑 왔는데 먼저 같이 왔던 사람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어. 아예 누군가 기억조차 나질 않더라니까?”


당장 긴 모험 끝에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이 당당히 말하는 친구의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드디어 철이 드셨나보죠 우리 이 선생님.” 하고 픽 웃으며 내가 대답했다.


“항상 나는 그걸 겪으면서 뭔가 데자뷰(Deja vu)를 느낄 때처럼, 이미지의 잔상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거라고 생각했었어. ‘누구랑 같이 와도 이 현상은 계속 발생하겠구나.’ 했는데, 최근에 새로 생긴 연인이랑 어제 함께 보내면서 똑같은 과정과 절차를 정해진 대로 밟았는데 이번엔 전혀 이전 연인이 생각이 나질 않았어.”


“그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이유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물었다.


“그만큼 이 사람이 가진 '나에 대한 사랑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방증 아닐까?” 친구가 대답했다.


친구의 그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그냥 일상적인 주제로 돌아갔다. 더 이상 듣기 거북해서 주제를 바꾸기도 했지만 나도 친구가 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일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머릿속에 친구의 질문이 떠다니며 내 신경을 분산시켜 결국 그 날의 업무 능률은 저하되어 버렸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이전의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당연 그러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지금의 연인과 건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전의 연인이 있었다면 나름대로의 ‘데이터’ 역시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데이터가 여러 번의 연애를 통해 모이고 모이면 흔히 몇몇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O이 다 그O이다.’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학습을 한다. 사람과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이며 이는 이성과의 관계에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경험을 통해 모인 데이터는 그렇게 내가 행동할 양식과 대화할 기반을 만들어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또 다른 관계를 맺으며 이 경험 속에서 또 다시 학습이 진행된다.


 내 친구의 경우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가 누적된 뇌에서 아마 친구가 가장 편하고 아늑해지고 긴장이 완화되는 순간인 ‘사랑을 나눈 후의 샤워’시간에 그 간의 데이터가 집약된 저장공간에서 누수(?)가 발생했든지, 아니면 기억회로가 엉켰든지 해서 이전 사람들의 모습이 덧입혀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경험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고, 또 그 경험을 통해 지금의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데이터들 역시 나 또는 내 연인을 이루고 있는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단, 과거에 얽매여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전 연인의 모습을 지금 연인에게 바란다거나 하는 것은 안 되겠지. 그런 바람은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니까.


 내 친구도 사뭇 진지하게 나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그 순간만 그랬을지 아니면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한 매 순간순간 옛날 연인들의 모습이 겹쳐졌는지는 오직 친구만이 알 길이다. 다만 이전의 모든 데이터를 날려버릴 정도로 친구의 마음이 사로잡힌 거라면 나는 친구 뜻대로 결혼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닳고 닳은, 산전수전 다 겪고 애정의 전선(戰線)에서 퇴역한 노련한 장교 같은 내 친구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간 그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 나도 무척 궁금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씨몽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